악당 가족이 독립을 반대한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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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는 광경이 연이어 펼쳐졌다. 성스러운 제의 도중 급작스럽게 상공에 나타난 거대한 균열. 쏟아지는 마수. 피비린내. 충돌과 비명…….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끈 것은 한 사람이었다. 엘로디 페르디아. 그녀는 홀로 마수가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균열이 있는 곳을 향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먼 곳에 있는 제국민의 대부분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페르디아 가문에 옅은 백금발의 성질 나쁘지만 예쁜 공녀이자 사생아가 있다는 사실은 웬만한 백성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므로.
백성들 사이에서도 기함하는 외침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그런데도 기어코 제단 앞까지 오른 엘로디는 검게 물든 제단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직후 벌어진 일은 그 누구도 평생 잊을 수 없으리라. 파앗-! 눈이 멀 듯한 순백의 빛이 대광장 전체를 뒤덮었다. 그와 동시에 결코 다물릴 것 같지 않던 균열이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아물기 시작했다. 닫히는 균열을 어떻게든 빠져나와 지상에 발을 딛으려 발악하는 마수들은 서로 뒤엉킨 채 사지를 바둥거렸다. 그 모습은 흡사 전세기 이름을 떨친 한 화가가 그린 그로테스크한 명화 같았다. 그러나 마수들의 발악도 한순간이었다. 끼애애액! 툭, 투툭. 닫혀 버린 균열에 입구 근처에 몰린 채 끼어 있던 마수들이 갈라져 바닥에 떨어졌다. 이미 균열을 빠져나왔던 나머지 마수를 처치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똑똑히 목도했다. 검게 물든 제단이 어느새 새하얀 제 빛을 되찾은 것을. 온 세상에 구원자의 존재를 공표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환호성도 잠시, 이 상황을 끝내 놓은 당사자의 몸이 기우뚱 아래로 기울더니-.
그대로 추락했다. 지켜보던 누군가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 순간이었다.
페르디아 공작, 얀시, 카를로트, 마지막으로 아덴미르까지. 대광장 곳곳에 퍼져 있던 그들은 제각각 엘로디의 이름을 부르며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갔다. 하지만 모두 제단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기에 추락하는 속도를 따라잡는 것은 무리였다.
각각 소멸의 권능과 지반 붕괴의 권능을 가진 형제는 그저 달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고, 그나마 공작이 권능을 사용하여 가공할 정도의 속력으로 달렸지만 엘로디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까마득히 높은 제단에서 추락하면 살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되는가. 상상하기도 싫은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지기 직전, 이변이 일어났다. 눈 깜짝할 사이 엘로디의 앞에 도달한 누군가가 곤두박질치기 직전, 그녀를 가뿐히 품에 안은 것이다. 네 명의 사내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나직한 음성의 주인은 실베스터 페르디아였다. 그는 제 딸을 안아 든 사내의 얼굴을 주시했다.

용병 이안. 엘로디의 호위 역으로 그가 직접 곁에 붙여 놓은 자였다.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기척도 없이 누구보다 먼저 접근해 엘로디를 낚아채다니. 문득 실베스터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이안이 손댈 생각 따위 하지 말라는 듯 자못 위험한 기세로 그를 주시하는 것이다. 우습게도. 저가 뭐라고. 그는 조소하며 한 발짝 떼었다.
레이안은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을 감은 엘로디를 잠깐 내려다보았다. 무언가 갈등하는 얼굴이었다. 그럴수록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얀시가 날뛰려는 카를로트를 잡아끌며 만류했다. 갈등이 끝났는지 엘로디를 다시 한번 눈에 담은 레이안이 실베스터에게 다가와 순순히 그녀를 넘겨주었다. 엘로디 페르디아가 무사히 제 아버지의 품에 돌아가자, 숨죽이며 관망하던 백성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어쨌든 살았다. 살아남았다는 환희에 전율했다. 그중에는 소중한 사람을 잃은 자들의 절규도 섞여 있었다. 제국군 뒤에 숨어 있던 귀족들의 얼굴은 어째서인지 사색이 된 채였다.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페르디아의 둘째 딸이 이 장소의 모든 생명을 구했으며, 나아가 제국의 안위를 지켜 냈음을. 마냥 찬사와 환호를 내뱉는 백성들과 달리 그들의 입장은 퍽 곤란했다. 아무리 페르디아라지만 은근히 무시하던 존재를 쉬이 구원자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무슨 수로 균열을 닫았는지 조사가 필요할 듯하군요.”
누군가의 말에 귀족들은 잠자코 고개를 주억거렸다. 구원자고 뭐고 진상 조사를 마친 후에 추앙해도 늦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구원자는 까무룩 잠든 상태였다. . . . 한편, 대광장의 어느 구석에서는.
“엘로디 페르디아…….
이르칼라 신의 심판대에 오른 인간이 저 여자였군.”
임무를 완수한 마법사가 미소 지었다. *** 따뜻하고 포근하고, 향기로웠다. 구름에 휩싸인 것처럼 편안한 감각에 취해 있던 내 정신은 이내 서서히 명료해졌다.
계단 아래로 몸이 기운 것도 같고.
깜짝 놀라 눈을 뜬 나는 더 놀라고 말았다.
나긋나긋한 음성의 주인으로 인해 두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으니까.
세베레스 공작, 즉 친부의 과거에서 보았던 엄마가 눈앞에 있었다. 놀랍도록 나와 닮은 생김새. 하지만 분위기는 달랐다. 그런데 내 눈앞의 엄마는 그저 옅게 미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풀었던 마음이 풍선이 터지듯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그냥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엄마가 아니라는 걸. 상대방은 내가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내가 보고자 하는 모습. 그렇다면 나는 줄곧 엄마가 보고 싶었던 걸까.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신은 보고자 하는 모습으로 인간들의 앞에 나타난다고.
내 태도는 호의적이지 못했다. 절대자를 만났다며 그저 신기해하기에는 지나온 삶이 너무나 기구했다. 신에게 간절히 빌었던 만큼 신을 원망했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이 큰 것처럼, 나는 언제나 절박했으니까. 그러므로 내 바람을 들어주지 않는 신을 미워했다. 그런데 그런 신이 내 앞에 있었다. 이슈타르는 안쓰럽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노여워 말거라. 이제야 너에게 닿을 수 있었기 때문이란다.
돌고 돌아 겨우 만나지 않았니.]
나는 이제 이곳이 그저 책 속의 세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간 겪은 일을 토대로 책이라고 알고 있던 게 나의 전생 중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건 레이안의 말을 들은 후의 추측일 뿐, 진실이라 확신할 수 없었다.
“제가 책 속의 내용이라고 믿었던 건,
저의 전생인가요?”
[그렇단다, 아이야. 다만 누군가 개입하여 온전하지 않은 기록이란다.]
“그럼 저는 어째서 전생을 책 속의 내용으로 기억하고 있는 걸까요?”
[너의 어미이자 나의 또 다른 아이 아르셀리아가 세계의 기록을 관리하는 사서이기 때문이지.]
레이안이 말했던 그대로였다. 이슈타르 신의 사서인 엄마가 나를 구하기 위해 다른 세계로 보내며 전생의 기억을 책이라는 형태로 부여한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이르칼라가 개입하여 내용을 조작했던 거고. 비로소 어그러진 퍼즐이 하나둘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에스텔은 대체 누구인가요?
정말로 존재하는 사람이에요?”
그렇다는 건, 없는 존재를 개입하여 꾸며 낸 건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찾기가 힘들지?
꼭꼭 숨은 것도 아닐 텐데.’
내 상념은 길어지지 못했다. 잠깐 옆을 흘끗 본 이슈타르가 나긋하게 말했다.
[너와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단다,
나의 아이야.]
[곧. 이제 공간이 무너지겠구나.
이르칼라가 지상에 영향을 끼친 만큼 나 또한 존재할 수 있으니…….]
그녀의 말대로 정말 주변의 공간들이 알이 깨지는 것처럼 조각조각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담담한 이슈타르와 달리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물어봐야 하는 게 너무 많은데, 마음은 조급하고 시간은 없었다. 나는 다급히 외쳤다.
챙-! 이슈타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간이 깨졌다.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나는 마지막 물음을 던졌다.
왜 하필 나야? 당연하게도 그 물음에 대답해 주는 이는 없었다. *** 엘로디가 기적을 보인 후로부터 3일. 그녀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했다. 제도의 유능한 의원이란 의원은 다 데려와 보였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엘로디가 일어나지 못한 지금도 외부 상황은 급박하게 흘러갔다.
“엘로디 페르디아에게 진상 규명을 요청하는 바요.
성스러운 힘인지 사특한 힘인지 알 길이 없지 않소?”
“공을 치하함은 시시비비를 가린 후에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앙겔로스 공작을 위시한 일단의 귀족들이 엘로디 페르디아의 진상 규명을 주제로 대귀족 회의를 열겠다며 엄포를 놓고 있는 탓이었다.
‘쯧. 엘로디가 아니었으면 마수들의 식사 거리나 되었을 놈들이.’
페르디아 공작은 그들의 농성을 깔끔히 무시하고 바깥출입을 끊었다. 더불어 페르디아는 원래도 폐쇄적이던 저택의 문을 더욱 단단히 걸어 잠갔다.
흉흉한 가주의 기세에 사용인들은 숨소리도 죽인 채 조용히 제 할 일을 했다. 엘로디의 침실에 들어선 페르디아 공작은 이미 그곳에 자리 잡고 있는 세 사람을 마주했다. 그의 아내와 두 아들들이었다. 그들은 한 시도 눈을 떼지 않고 엘로디의 곁을 지켰다. 언제 이리도 애틋해졌던가. 영락없는 가족이었다. 언젠가 떠날지도 모르는 아이라 정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씁쓸하게 웃으며 공작이 엘로디의 옆에 가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얀시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앙겔로스 공작을 떠올린 카를로트가 씩씩대며 분노를 삭였다.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공작 부인이 아들을 타일렀다.
부인은 죽은 듯 잠든 엘로디를 안타깝게 보았다. 도무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누님이 썼던 그 능력은 뭐예요?
독성을 파괴하는 권능이랑은 아무 관련이 없는 것 같은데.”
카를로트의 말에 그들의 심경이 복잡해졌다. 모두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 한 명, 페르디아 공작만이 침착했다.
“어쨌든 대단하긴 했지.
리리 누님,
그 정신 나간 균열을 막아냈으니까!”
호들갑스러운 카를로트와 달리 얀시는 줄곧 표정이 어두웠다. 분위기를 살피던 얀시가 이내 침묵을 깨며 물었다.
“아버지는 뭔가 알고 계시죠?
리리가 썼던 능력이 뭔지.”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던 큰아들이 주저 없이 그의 황금색 눈을 직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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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순 페르디아 공작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새삼 아들의 성장이 두드러지게 와 닿았다. 페르디아의 후계자라는 이유로 의젓하지만 한편으로는 제 속내와 의도를 숨기기에 급급하더니, 이렇게 대놓고 물을 줄도 아는 녀석이었나. 카를로트에 이어 얀시까지 친부인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무엇이 두 아들을 변하게 했는가.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엘로디와 관련된 일에 녀석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렇다면 그 자신도 그러할까.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얀시가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긴장감이 무색하게도, 페르디아 공작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 얀시는 그런 아버지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뭘 어쩔 수 있겠는가? 가주를 상대로 얀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형과 아버지가 신경전을 벌이거나 말거나 카를로트는 시무룩한 얼굴로 잠든 엘로디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엘로디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눈을 떴다.
오직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페르디아 일가가 일제히 엘로디를 바라보았다. *** 오랫동안 잠들었다가 깨었을 때 으레 그렇듯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런 나를 맞이한 건 실로 두려운 광경이었다.
순간 눈을 의심했다. 당연히 깨어나면 혼자 있거나 혹은 마사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페르디아 인간들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무려 네 명이나 있었다! 너무 놀라 벌떡 상체를 일으킨 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는 내게 처음으로 말을 건넨 건 공작 부인이었다.
사실은 머리가 너무 아픈 데다 갑자기 몸을 일으켜서 현기증이 일었지만 그것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어쩐지 침대 옆에 바짝 붙어서 팔짱을 끼고 앉은 카를로트가 볼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3일? 3일이나?
카를로트가 왈칵 성을 냈다. 나는 그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건 마치 이 자리의 모든 페르디아의 성을 단 사람들이 나를 걱정했다는 의미로 들리잖아. 정말 의아하게도 누구도 걱정했다는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누군가가 나를 걱정한다는 그 말이 얼마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드는지 모른다.
끝까지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아프다고 말하면 더 관심 줄까 봐. 괜히 말했나? 소심하게 고개를 들었다가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내려다보던 페르디아 공작이 성큼 다가왔다.
굳은살 박인, 뼈대가 굵은 커다란 손이 내 이마 위를 덮었다.
“혹시 모르니 의원에게 보이는 게 좋겠다.
다른 불편한 게 있다면 언제든 말하거라.”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두 손으로 내 이마를 짚고 있는 공작의 팔을 황급히 부여잡았다.
3일 전의 사건. 탐욕이 이르칼라를 부르짖는 순간 마수가 내게 쏟아졌다. 그때 내 앞을 막아서며 마수의 손톱에 페르디아 공작의 어깨가 무자비하게 꿰뚫렸다. 지금도 눈감으면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바닥에 뚝뚝 떨어질 정도로 출혈이 컸는데, 괜찮은 걸까? 겉으로 보기에 공작의 얼굴에 병색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의복 안이 상처투성이일지도 모른다.
말만으로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공작의 팔을 꼭 붙잡고 있자, 공작이 피식 웃었다.
“왜. 여기서 옷이라도 벗어서 확인시켜 주면 믿겠느냐?”
그러자 뒤에 있던 얀시가 헛기침했다.
“누님. 아버지 걱정하기 전에 누님 걱정이나 해.
아버지는 보통 사람보다 회복력이 빠르시다고.”
그렇게 말한 카를로트가 ‘그리고 우리 눈 걱정도 해 달라고’라며 툴툴대며 작게 덧붙였다. 사실 그게 본론인 듯했다.
이러다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고 싶어 하는 파렴치한 딸이 될 것 같아 얼른 공작의 팔을 놓았다. 아하하. 머쓱하게 웃고 있다가 공교롭게도 얀시와 눈이 마주쳤다. 얀시가 다정하게 웃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그래.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흑막 중의 흑막 얀시 페르디아는 알고 싶은 건 꼭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 아니던가. 지금 필요한 건 뭐? 바로 할리우드 뺨치는 연기력!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혼란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일단 모르쇠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기억이 안 나요. 정신을 차리니까 제단 앞에 있었는데……
으윽. 머리가……!”
진짜 머리가 아프기도 해서 고통스러워하는 연기가 제법 그럴싸했다.
침대에 걸터앉은 공작 부인이 내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이렇게까지 걱정해 줄 줄은 몰라 몸이 흠칫 굳었다.
“누님이 이슈타르의 구원자인지 뭔지 아무튼 그거니까 그런 거겠지.
전에 신전에도 뚝 떨어졌었잖아?”
카를로트는 혼자만의 추측을 늘어놓으며 얀시의 추궁을 막았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얀시라는 인간은 아주 집요하니까.
애처롭게 중얼거리며 몸을 웅크렸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가증스러운 연기에 속으로 감탄하고 있을 때, 묵직한 음성이 위에서 들려왔다.
“얀시. 그쯤 해 둬라.
안 그래도 아픈 애 괴롭히지 마.”
엄청 아픈 것도 아닌데, 병자가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페르디아 공작까지 나를 감싸자 얀시도 더는 추궁하지 못했다.
문밖으로 나가는 순간, 얀시의 눈길이 어딘가로 향했다. 그 시선이 향한 곳을 본 나는 흠칫 놀랐다. 얀시가 반항적인 눈빛을 보이다니? 그것도 페르디아 공작한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아는 얀시는 페르디아 공작에게 인정욕이 강한 인물이었으니까. 아니, 나는 금세 생각을 털어 내었다.
‘원작 같은 건 의미 없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으니까.’
조작된 기록이라고 한들 본질은 전생의 기억이니 완벽히 배제할 수 없다지만, 더 이상 얽매일 생각은 없었다. 이미 많은 게 달라졌다. 지금처럼 페르디아 사람들의 걱정을 한 몸에 받는 것도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 아닌가. 이제 피해선 안 된다. 이 사람들과의 관계도,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들도 모두. 제대로 마주하자. 도망치지 말고.

***
달칵-. 공작 부인과 카를로트가 인사를 하고, 침실 밖으로 나감과 동시에 나는 혼자가 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다.
묵묵부답. 나는 코웃음을 쳤다. 당연히 예상했던 반응이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흑여우라고 불리는 게 그렇게나 싫은지 탐욕이 금세 대답했다. 얄미워서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녀석에게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름.
아무 기억이 없음.
아아, 머리가 아픔!]
아까 내 연기를 보고 배우기라도 한 건지, 탐욕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만 연발했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봉인석을 목에서 풀어냈다.
대답 없이 침대에서 내려와 테이블 위에 있는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그것이 뭔지 알아본 탐욕이 질겁했다. 생각보다 격렬한 반응에 입꼬리가 씰룩였다.
크하하. 테이블 위에 봉인석을 내던진 후 악당처럼 웃으며 과도를 치켜들자 탐욕이 애타게 울부짖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과도를 내리찍었다. 콱-.
의도했던 대로 과도가 내리꽂힌 곳은 봉인석의 바로 옆이었다. 조금만 삐끗하면 바로 봉인석을 꿰뚫어 버릴 옆. 애초에 쓸모 있는 탐욕의 능력을 버릴 생각은 없었다. 겁만 좀 주려는 거였지. 정말로 봉인석을 부술 줄 알았던 건지 탐욕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귀를 따갑게 만들었다.
정의의 힘 덕분에 탐욕이 말을 잘 듣게 되었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네 전주인을 끔찍이 생각하는 마음은 잘 알겠어.
참으로 눈물 나는 충성심이야.
그런데 그러면 안 되지,
이 배신죄악아.
지금은 나랑 계약한 상황인 걸 잊지 말라고.”
기합이 바짝 들어간 다짐이 마음에 들었지만 짐짓 엄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나는 불쌍한 척 칭얼거리는 탐욕의 목소리를 가볍게 무시하며 침대 옆 서랍을 뒤졌다. 막 통신 마도구를 꺼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문밖에서부터 들려왔다.
마사가 식사가 든 쟁반을 테이블 위로 내팽개치며 내게 달려왔다.
흘러넘친 수프가 몹시 아까웠지만 힘겹게 눈길을 돌리며 마사를 달래 주었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입에 담지도 마세요!
제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아세요?”
그러고 보니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 페르디아가 아니지만,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사람.
“갑자기 왜 그러시는데요.
저 무서우니까 그런 최후의 인사 같은 말 하지 마시라고요.”
갑자기 진지하게 고맙다고 말하자 낯간지러운지 마사가 질색하며 대답했다. 더 마음을 표현했다간 죽지 말라고 오열할 것 같아 화제를 돌렸다.
“마사.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발간된 신문이나 잡지 좀 모아 줄래?”
“가지고 올 테니까 식사하고 계세요.
엄마야,
수프가 반이나 줄었네?”
마사가 나를 침대에 도로 앉힌 후에 식사를 세팅해 주었다. 나는 반밖에 남지 않은 수프를 조심스럽게 떠먹었다. 그런데 마사가 나가려다 말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아가씨. 아가씨 잠드신 동안 블랙이 안 보여요.
어떡하죠?”
봉인석 속 탐욕의 외침을 무시하고 나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대답했다.
언제는 마음에 안 든다더니 그동안 정이라도 붙은 건지 탐욕은 천년의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사를 애타게 불렀다. 당연히 그 목소리가 들릴 리 없는 마사는 쌩하게 방을 나갔다. 이윽고 마사가 들고 온 신문과 잡지를 확인한 나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이야기밖에 없었다!
5–7 minutes
여기도 엘로디, 저기도 엘로디. 그도 아니면 페르디아의 구원자. 망나니에서 단숨에 구원자가 되다니, 신분 상승도 이런 신분 상승이 없었다.
게다가 건국제의 이슈타르 구원자 사건은 내 생각보다 일이 복잡해진 상황이었다. 세상을 구했다며 칭송하는 제국민들과 달리 앙겔로스 공작을 비롯한 몇몇 가문들이 반대 뜻을 내놓았다. 수상한 힘이라나 뭐라나. 무슨 힘인지 정체를 밝혀야만 한단다.
어쨌든 내가 잠든 동안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대략 파악했다. 이번에도 앙겔로스 공작이 수작을 부리고 있는 모양이다.
‘그럼 난데없이 균열이 생긴 것도 앙겔로스 공작 짓인가?’
어쩐지 도로테아가 갑자기 쓰러진 것부터 수상하다 싶었다. 늘 상냥하게 웃고 있지만 본심은 남들의 위에 서고 싶은 그 성격상 제단 주관의 영예를 포기할 리가 없으니까. 비에탄 가문을 멸망으로 몰고 간 것은 앙겔로스의 선조들이었다. 또한 윌렌티아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의 배후에도 대부분 앙겔로스가 연관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이번 균열 사건까지. 확신이 들었다. 어떤 식으로든 앙겔로스 가문이 이르칼라 교단과 연결되어 있으리라고. 이슈타르의 권능을 부여받은 영웅의 후손이면서, 어떻게 지상을 집어삼키려는 이르칼라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거지? “아냐. 저런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신문과 잡지를 서랍 위에 올려 두고, 통신 마도구를 붙잡았다. 연락을 꼭 해야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통신을 시도한 지 몇 초도 되지 않아 금세 연결되었다.
고장 난 건가 싶어 마도구를 이리저리 살피고 있을 때, 음성이 들려왔다.
쿵, 하고 심장을 내리치는 듯한 묵직하고 낮은 목소리. 레이안의 그 말은 내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레이안은 나를 만나기 위해 차원을 넘고 또 넘어 기어코 찾아낸 사람이니까. 셀 수도 없는 시간 동안 기다려왔을 텐데, 또 기다리게 하고 말았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기다리는 거,
정말 싫었을 텐데.”
레이안은 빈말로도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다. 괜찮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그가 솔직하게 대하니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괜찮다며 속마음을 감추었다면 오히려 죄책감을 더 많이 느꼈을 테니까.
깜짝 놀라서 묻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레이안은 더 이상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통신구를 내려다보았다. 기다림은 길었지만 대화는 너무도 짧았다. 그는 찰나 같았던 엘로디와의 대화를 곱씹었다.
고백한다. 그는 한순간 다쳤다고 거짓말을 할지 깊게 갈등했다. 좋은 핑곗거리였다. 다쳤다고 말했다면 마음 약한 엘로디는 단숨에 그를 만나러 왔을 테니까.
못내 아쉬움이 남았다.

*** 회복에 집중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여전히 나는 본 저택에서 지내는 중이었다. 이쯤 되니 별채로 돌아가는 건 포기해야 할 듯싶었다. 본 저택도 좋긴 좋았다. 별채로 유배당한 주방장도 나를 따라 본 저택으로 돌아와서 식사도 한층 맛있어졌고, 또 방도 전보다 훨씬 좋고, 다 좋다. 다 좋은데. 역시 문제가 있다면……. 똑똑똑똑-. 벌컥!
들어오라고 대답도 안 했는데 노크하자마자 냅다 문을 열어젖히는 이 카를로트 놈이었다. 언제 들어올지 몰라서 늘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혹시라도 통신 마도구라도 들키면 곤란해진다. 나는 다시 보고 있던 책에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팔랑팔랑. 책장만 넘기자 카를로트가 시무룩하게 물었다.
안 먹으면 울겠는데? 책을 덮고 맞은편에 가서 앉자 카를로트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원래 다혈질에 단순한 녀석이긴 했는데, 요즘 정도가 더 심해진 것 같다. 무슨 생각을 하든 표정에 고스란히 다 드러났다. 나는 카를로트가 냉큼 내 앞에 놓아 준 포크를 들며 물었다.
으음. 딱 봐도 시종에게 심부름시킨 건데. 자기도 양심에 찔리는지 카를로트는 내 눈을 피했다. 나는 모른 척 눈감아 주었다. 어쨌든 내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준비했다는 마음이 갸륵하지 않은가.
우리는 퐁당 쇼콜라를 나눠 먹으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아버지랑 어머니 잠깐 외출하셨어.
가문 일로 외부에 볼일이 있다나 봐.
얀시 형도 나간 것 같아.”
내가 깨어나지 못하는 동안 페르디아는 외부 활동을 중단하고 칩거에 들어갔다. 건국제에서 내가 보였던 힘을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앙겔로스 공작 무리를 무시하기 위해. 하지만 이제 다시 활동을 시작하려는 모양이었다.
생각만 했을 뿐인데, 그것은 머지않아 사실이 되었다. 디저트를 반도 먹지 못했는데, 집사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집사의 표정이 자못 어두웠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손님이 방문했다고 저런 반응일 수 없었다. 냉철하기로 유명한 집사가 정색할 정도라면 범상치 않은 상대일 터.
“예. 앙겔로스 공작의 대리인과 황실의 군사가 아가씨를 모시러 왔다고 합니다.”
말은 모시러 왔다고는 하지만 끌고 가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나저나 황실의 군사까지 거느리고 올 줄이야. 저택에 페르디아 공작 부부가 없는 틈을 노린 듯했다. 얀시마저 없는 지금, 나를 보호할 사람은 없으니까. 어찌 되었든 황실마저 연관된 상황에서 그들의 방문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혹시 모르니까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게 좋으려나.
그 사이에 페르디아 공작이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카를로트가 노발대발하기 시작했다.
“하! 염병할 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와?
누님은 나올 필요 없어.
내가 처리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
너무나도 신경 쓰이는 말을 남기고 카를로트가 창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시간을 끄는 방법은 글렀다. 카를로트가 황군을 상대로 사고 치기 전에 내가 나서야 했다. 방을 나가려다 말고 나는 집사를 돌아보았다.
공작 부부의 출타 소식이 이렇게 쉬이 외부에 퍼져나갔으니.
*** 쾅! 콰과광! 순식간에 땅이 무너지고 대지가 진동했다. 정문에 가까워지니 카를로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망할 놈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쳐들어와?
누님이랑 오붓하게 케이크 먹고 있었는데!”
쿠구궁!
“진정하십시오, 카를로트 페르디아 공자!
황군을 상대로 무력을 행하시려는 겁니까?”
“아니? 그런 적 없는데?
나는 그냥 우리 집 대문 앞 부수는 것뿐인데?
내 집인데 네놈들이 무슨 상관이야?
우리 땅이거든?”
카를로트는 그 잠깐 사이 엄청난 짓을 벌여 놓았다. 권능을 펑펑 써 대며 지반을 있는 대로 붕괴해 놓은 것이다. 카를로트 뒤에 페르디아의 기사들이 난감한 얼굴로 도열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차마 가문의 도련님을 말리지는 못하는 눈치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딱 앙겔로스 대리인과 황군 앞까지를 갈아엎어 그들에게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는 것일까.
“어쭈? 금방 발 움직였지?
넘어오기만 해라.
다 뒈진다?”
“저희는 황가의 명으로 레이디 페르디아를 모시러 왔을 뿐입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카를로트는 또 분을 못 이겨 바닥을 쾅쾅 갈아 대었다. 정문 앞은 그야말로 초토화 상태였다. 이러다가 정말로 저들에게 상처를 입히기라도 하면 일이 커진다. 나는 돌 잔해를 밟으며 카를로트를 향해 다가갔다.
바로 직전까지 살벌하게 기운을 뿜어 대던 카를로트가 나를 보자마자 반갑다는 듯 웃으며 내게 쪼르르 달려왔다. 그러자 맞은편의 불청객들이 경악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직전까지 폭주해 대던 카를로트가 금세 진정한 게 놀라운 듯했다.
황군 무리의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직접 눈으로 본 카를로트의 권능이 새삼 두렵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레이디 페르디아께서 직접 나오셨으니 이야기가 더 빠르겠군요.
건국제 건으로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앙겔로스 공작의 대리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그들은 가능하다면 무력을 불사해서라도 나를 끌고 갈 기세였다. 일부러 페르디아 공작 부부가 없는 이때를 노리고 왔으니 당연하겠지. 그러나 아무리 공작이 없다고 해도 페르디아 저택의 사병과 카를로트만으로 저들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자칫 페르디아를 공격하기 위한 빌미이자 좋은 수단이 될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걸 노리고 자극하기 위해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쳤다.
한발 물러나 나중에 가겠다고 말했으나 그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럴 수 없습니다.
혹 조작 가능성이 있으니 레이디 페르디아께서는 황실에 마련된 곳에 격리되실 겁니다.”
조작하려고 했으면 건국제 이후부터 며칠이 지난 지금 이미 충분히 하고도 남았다. 저건 그냥 나를 데려가기 위한 얄팍한 핑계에 불과했다.
잠깐 고민하던 나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검증이 끝난 후 그대들의 처분은 각오해야 할 것이다.”
경고까지 끝마친 나는 선선히 발걸음을 떼었다. 하지만 몇 발짝 가지도 못하고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카를로트가 내 손을 붙잡았기 때문에. 뒤돌아 녀석을 본 나는 카를로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가 귀환하실 때까지 시간 끌려고 했던 계획을 망친 건 너야,
카를.”
카를로트의 눈이 충격으로 얼룩졌다.
나는 녀석에게 어쭙잖은 위로 같은 걸 건네지 않았다. 아무리 어리고 철없다지만 카를로트도 제가 한 일에 어떤 책임이 뒤따르는지 알아야 했다.
“아버지께서 귀택하시거든 곧바로 상황을 알려.
그리고 이슈타르 신전 측에 연락하시라고 전해드려.”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나를 쳐다보는 카를로트를 뒤로한 채 마차에 올랐다.

6–7 minutes
마차를 타고 황성에 입성해 서쪽 별채에 도착하는 동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앙겔로스 공작이 연관되어 있으니 혹시나 이동 과정에서 나를 제거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건 다행히도 기우였다.
혹시 이동 중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 서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을 테니까. 페르디아 공작이 무섭긴 한가 보다. 격리라는 명목으로 내가 갇힌 곳은 별채의 화려한 손님용 침실이었다. 가구든 침구든 눈에 닿는 것마다 죄다 최고급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페르디아 공작이 본 저택에 꾸며 주었던 내 침실만 못했다. 내가 알기로 서쪽 별채는 황성의 귀빈이 방문할 때 개방하는 건물로 알고 있었다. 귀족이니만큼 음습한 지하 감옥에 보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융숭한 대접이었다. 그렇다고 귀족 취급에 멍청이처럼 기분이 좋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이건 보여 주기식 대우였으니까. 나중에라도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겉으로나마 예의를 차리는 것이다.
귀족들은 죄수 취급도 좋구나.
대외적으로 병석에 누워 있을 황제가 나의 체포 명령을 내렸을 리 없으니 범인은 황비였다. 아들인 벨트란 짝으로 나를 밀어주려다 뜻대로 안 되니까 흑화한 걸까? 내 신변에 위협을 가할 생각은 없어 보이니 일단 안심이었다. 혹시나 방에 감시용 마도구가 설치되어 있지는 않은지 샅샅이 살피던 중,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성의 기미라고는 없이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려고 틈을 노리는 탐욕에게 냉정하게 대답하며 침대에 털썩 앉았다. 당장 눈에 보이는 곳에 마도구는 없는 것 같았다. 내가 발견 못 한 것일 수도 있으니 최대한 수상하지 않게 행동하려 애썼다. 잠시 후 사용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들어와 아무 말 없이 다과를 내려놓고 나갔다. 탐욕이 탐욕스럽게 과자를 노렸다.
독이 들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만약에 독이 들어 있다면 고통은 고스란히 느낄 것이다. 그럼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질 텐데, 그걸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이상 방심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 격리라고 쓰고 감금이라고 읽는 이 상황에도 장점이라면 장점이 있었다. 바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 건국제 사건 때 기절했다가 깨어난 이후로 본 저택에 있다 보니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가 없었다. 방해하는 사람도 없으니 마음껏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떠오른 건, 이슈타르와 했던 대화였다.
우선 엄마. 닿을 수 없는 깊은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살아 있다는 건 확실했다. 신인 이슈타르마저 닿을 수 없다고 확언했으니 고작 인간인 내가 엄마를 찾아낼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다음으로 친부.
이슈타르는 나 또한 아이라고 불렀다. 그뿐만 아니라 엄마나 레이안도 이슈타르의 ‘아이’였다. 결국 이슈타르가 아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권능을 가진 영웅들과 그 후예가 되는 것이었다. 친부를 깨우기 위해선 멸망한 두 가문을 포함한 일곱 가문 중에 ‘다섯 번째’를 찾아야 한다는 것 같은데…….
나는 얼마 전 역사서에서 읽은 일곱 가문의 권능을 속으로 되뇌었다. <빛>의 윌렌티아. <암흑>의 비에탄. <파괴>의 페르디아. <정화>의 세베레스. <재생>의 앙겔로스. <변이>의 크룬델. <예지>의 아펠리테. 그 외의 단서라면 ‘꿈’이긴 한데, 이슈타르가 영웅들에게 부여한 권능 중에 꿈은 없었다. ……혹시? 한 가지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속으로 탐욕을 불렀다.
이 비협조적인 태도 좀 보라. 나오지 못하게 한 데다 과자도 못 먹게 하니 뿔이 단단히 난 듯했다.
그러자 탐욕이 냅다 대답했다.
나태. 나태라면-.
크룬델 가문이 봉인한 죄악이 바로 나태였다. 나는 크룬델 공작을 떠올렸다.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공식 행사에서 멀찍이 얼굴을 본 기억이 있었다. 미혼의 젊은 공작으로 얀시와 카를로트와 함께 사교계의 손에 꼽히는 신랑감 후보였다. 어떤 가문인지 알아낸 기쁨도 잠시, 나는 곧바로 절망에 휩싸였다.
친하지도 않은 가문의 여식이 난데없이 접근해서 죄악 달라고 하면 누가 주겠냐고!

*** 엘로디가 절규하고 있을 그 시각. 페르디아 공작은 가문을 폐쇄하는 동안 밀린 외부 일정을 소화 중이었다. 대리인과 함께 제 권역에 속한 지역을 둘러보며 보고받고 있을 때, 익숙한 기척이 가까워졌다.
오늘 일정은 훈련밖에 없는 둘째 아들 카를로트가 말에서 내려 그의 앞에 섰다.
통신 마도구가 출시된 지 그렇게 오래된 게 아니라 들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잊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리라 예상했던 카를로트는 빠르게 상황을 보고했다.
“앙겔로스 공작 대리인이 황군과 함께 들이닥쳐 리리 누님을 데리고 갔습니다.”
엘로디는 카를로트에게 페르디아 공작이 귀택하면 그때 상황을 알리라고 했지만 그는 도무지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기다렸다가, 혹시라도.
카를로트는 지난 습격을 기억했다. 엘로디가 제 손을 망설임 없이 놓았던 그때의 습격을. 그게 앙겔로스 공작의 짓이라고 했다. 그랬던 작자가 엘로디의 목숨을 또 노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위험한 곳으로 끌려가는 엘로디를 붙잡지 못했다. 무능했다. 여전히. 자책을 거듭하던 카를로트가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말에 올라 저택 밖으로 달리는 중이었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고삐를 붙잡은 손이 쉴 새 없이 떨렸다. 카를로트의 보고를 들은 페르디아 공작의 황금색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리리 누님이 이슈타르 신전에 연락을 취하라고 했습니다.”
카를로트의 떨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아버지라면 누이를 쉬이 구해 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페르디아 공작의 답은 뜻밖이었다.
당연히 바로 엘로디를 구하러 갈 거라 생각했던 카를로트는 아버지에게 항의했다.
“하지만 상대는 앙겔로스 공작입니다!
그 사이에 누님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질책하는 아버지의 눈빛에 카를로트는 뻣뻣하게 굳었다. 날뛰는 아들을 위해 실베스터가 나지막이 설명해 주었다.
“지금 황성에 군사를 이끌고 간다면,
그것은 반역이다.”
앙겔로스 공작 독단적 행동이 아닌, 황군까지 합세했다면 황비가 연관되어 있을 터. 병석에 있는 황제의 권한을 대부분 가지고 있는 것은 황비였다. 그 뜻에 반한다는 것은 황명을 거역하는 것과 같았다.
항의하려는 카를로트의 말을 자르고, 페르디아 공작이 단호하게 물었다.
“애초에 엘로디가 가지 못하도록 막지 않고 뭐 했지?”
공작의 의문이 풀렸다. 그래.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최근의 엘로디라면 그들이 저택까지 밀고 들어왔다 해도 가주인 자신이 귀택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째서 나섰는가에 대한. 날뛰는 동생을 보호하려다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군. 카를로트가 평소보다 더 흥분한 것도 이해가 갔다. 죄책감 탓이리라.
페르디아 공작은 외부 일정을 중지하고 말 위에 올라탔다. 그는 제 아들을 돌아보았다. 카를로트는 아닌 척하면서도 여전히 떨고 있었다.
과거의 엘로디라면 꺾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엘로디는 괜찮았다.
그는 이번 일의 배후를 떠올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 와작와작. 탐욕을 이불 속에 숨기고 그 속에 과자 접시를 넣어 주니 잘도 먹었다.
와작 와그작. 과자 먹는 탐욕을 멍하게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노크가 들려왔다. 누가 오든 상대하고 싶지 않아 자는 척 숨을 죽였건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벌컥-. 허락받지 않고 난데없이 문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당당하게 들어온 손놈은 바로 2황자 벨트란이었다. 놈은 내가 일어나 있을 줄은 몰랐는지 눈이 마주치자마자 멈칫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벨트란이 능글맞게 웃었다.
“공녀가 별채에 격리되어 있다는 말을 들으니 걱정돼서 말이야.
말동무라도 할까 하고.”
“괜찮습니다, 전하.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저놈이랑 데이트했다는 소문 때문에 기분 나쁜데 단둘이 밀회를 가졌다는 소문까지 난다면 다들 내가 벨트란과 교제하는 줄 알 것이다.
저런 망나니와 사귄다고 소문날 바엔 평생 수절하겠습니다. 그런 내 마음을 추호도 모를 벨트란은 내 축객을 무시하며 오히려 문을 닫고 들어왔다.
“괜찮아, 공녀. 들어오면서 사용인들은 이미 물렸으니까.”
대놓고 들어왔으니 소문나는 건 막을 수 없겠구나. 저 자식은 사용인들 입이 얼마나 가벼운지 모르는 걸까?
“먹고 싶은 거라도? 아니면 읽을거리라도 가져다줄 수 있는데.”
연거푸 거절했지만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없는 척하는 건지 벨트란은 포기하지 않았다.
“공녀가 꽤나 곤란한 상황이라는 걸 들었는데,
내가 어떻게 그냥 지나치겠어?”
무슨 대답을 해도 나가지 않을 기세였다. 나는 어디 하고 싶은 대로 실컷 떠들라는 마음으로 벨트란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놈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어, 어쨌든 내가 공녀를 만나러 온 건,
도움을 주려고 그런 거다.”
“듣자 하니 이대로라면 공녀가 곤란하다더군.
대회의가 열린다는데.”
고개를 끄덕이자 벨트란이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이번 대회의를 허락했지만,
내가 최대한 막아 줄 수 있어.”
‘네깟 놈이 과연?’이라는 의미로 물은 건데 ‘우와, 전하께서 저를 위해?’라는 의미로 들린 모양이었다. 벨트란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공녀가 원한다면 지금 당장 풀어 달라고 말씀드릴 것이다.”
나는 아무런 기대도 없이 물었다.
이번만큼은 벨트란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5–7 minutes

나는 벨트란을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난데없이 청혼이라니, 제정신인지 아닌지 의심이 되었다. 은근슬쩍 떠보며 수작질하는 것까지는 난봉꾼이니 그러려니 했지만 대놓고 청혼하는 건 다른 이야기다. 입 밖으로 꺼낸 이상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할 테니까. 내가 대답 없이 반반한 놈의 낯짝을 쳐다만 보자 벨트란이 괜히 헛기침했다.
거기에 내 의견은 없다 이거군. 상대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난 모양이다. 그런데 그 반응 또한 벨트란은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형제를 사이에 두고 가지고 논다느니 하며 쓸데없이 입을 놀리는 놈들은 내가 처리할 테니 공녀는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벨트란은 마치 내가 제 청혼을 이미 받아들인 것처럼 굴었다. 내가 거절할 거라는 생각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듯했다.
듣자 하니 황비가 오냐오냐 키운 것도 아니라던데.
“물론 공녀가 형님의 약혼자였지만,
어차피 지금은 파혼했잖아?
거리낄 게 있나?”
거리낄 게 너무 많아서 문제인데요.
“저기, 전하.
혹시 황비 전하께 아무 말씀 못 들으셨어요?”
너, 매 맞는 남편 되고 싶냐?
“어머니? 설마 어머니가 무서워서 머뭇거리는 건가?
물론 무서운 분이시지만,
공녀라면 걱정할 것 없어.
어머니가 공녀를 제법 마음에 들어 하니까.”
저번에 황비와 내가 했던 대화를 벨트란은 전해 듣지 못한 모양이다. 그래, 들었다면 청혼 같은 짓거리를 할 수 없겠지. 벨트란이 느끼하게 웃으며 말했다.
“공녀는 아무 걱정 없이 나와 결혼만 하면 돼.
그럼 대회의도 막아 주고,
앞으로 있을 공녀의 앞길에 걸리적거리는 걸 모조리 치워 줄 테니까.”
“어차피 약혼부터 시작할 테니 괜찮아.
우리에게 펼쳐진 시간은 무한하다고,
공녀!”
“헉, 약혼을 생략하고 바로 결혼……?
그래도 절차는 따르는 게 좋지 않을까?
아무리 내가 좋아도 말이야…….”
이 자식, 듣고 싶은 대로만 듣잖아? 어떻게 하면 이 착각병자를 큰 소란 없이 이 방에서 몰아낼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 내 처지가 갇혀 있는 만큼 2황자를 상대로 소동이 벌어지는 건 좋지 않았다. 여기가 페르디아 수도 저택이라면 모를까 황성이기까지 하니 장소도 유리하지 않다. 위기라면 위기에 봉착했을 그때였다. 벌컥-. 기척도 없이 문이 열렸다. 문을 등지고 있던 벨트란이 화를 내며 뒤돌았다.
“누구냐! 내가 나올 때까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거늘!”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1황자 아덴미르였다. 그는 거침없이 들어와 나와 벨트란 사이에 섰다.
“별채 사용인들 감독이 엉망이군.
도대체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지?”
아덴미르는 벨트란의 말을 무참히 끊으며 말했다.
“이렇게 아무나 드나들 정도로 경비가 허술하니 말이다.”
아덴미르는 무려 벨트란을 ‘아무나’로 취급해 버렸다. 벨트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에 반해 아덴미르는 여유롭게 웃으며 물었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신나게 망상을 펼치던 벨트란은 온데간데없었다. 벨트란은 초조해 보이기도, 혹은 화가 나 보이기도 한 얼굴로 아덴미르를 쏘아보았다.
“그러는 형님이야말로 귀빈이 머무는 별채에 이렇게 마음대로 출입해도 되는 겁니까?”
“잊은 것 같은데, 나는 부황께 황성의 모든 곳에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
너와 달리.”
아덴미르의 말은 단순한 자랑이 아니었다. 무려 친부이자 황제의 총애가 자신에게 있음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용케도 그 의도를 알아챘는지 벨트란의 얼굴은 더욱 분노로 얼룩졌다.
“병사를 불러 내쫓길 테냐,
아니면 제 발로 스스로 걸어 나갈 테냐?”
끌려 나가기는 싫은지 아덴미르를 노려보던 벨트란이 홱 돌아 박차고 나갔다. 쾅! 문이 거칠게 닫혔다. 정말이지 볼품없는 퇴장이었다. 벨트란이 나가자 침실에 남은 건 아덴미르와 나 둘뿐이었다.
“그럴 리가요. 방금만큼은 전하가 제 영웅이었는걸요.”
이건 빈말이 아니었다. 저 답도 없는 벨트란을 쫓아내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내 목소리에 진심이 묻어났는지 아덴미르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벨트란에게 감시를 붙여 놓았지.
아무래도 우리가 보통 형제 사이는 아니니까.”
아덴미르는 황위를 두고 견제하는 사이라는 말을 참 완곡하게도 했다.
“사실 벨트란과 그대가 나눈 이야기를 본의 아니게 엿듣고 말았어.
저놈은 공녀가 본인을……
좋아하는 줄 알고 있던데.
혹시 좋아한다던 사람이 벨트란인가?”
나도 모르게 썩은 표정을 지었는지 아덴미르가 곧바로 사과했다. 사과를 받았지만 나는 표정을 풀지 못했다. 벨트란을 좋아한다니,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내 대답을 끝으로 침묵이 흘렀다. 나로선 더 할 말이 없기 때문이었는데, 아덴미르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담담한 대답에 아덴미르가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침대 위에 웅크려서 훌쩍이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애도 아니고…….”
어째서인지 아덴미르의 두 눈이 커졌다. 하지만 찰나의 표정 변화라 놀란 얼굴은 금세 사라졌다.
아덴미르가 물었다.
“앙겔로스 공작 세력이 공녀를 공격할 텐데,
어떡하려고?
대책이라도 있나?”
내가 멋쩍게 웃자 아덴미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나를 마치 물가에 내놓은 아이 대하듯 바라보았다. 이렇게 대놓고 걱정하는 건 처음이라 기분이 이상해졌다.
대회의가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생각이 있긴 했다. 하지만 아덴미르와 내가 계획을 미주알고주알 떠들 사이는 또 아니니까 웃음으로 얼버무릴 뿐이었다.
생각에 잠긴 듯 침묵하던 아덴미르가 뜬금없이 말했다.
중립을 지킬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물론 페르디아 공작이 1황자의 세력이라고는 하지만, 그게 나를 변호하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아덴미르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내 덕분에 황제의 상태가 호전되었다며 아덴미르는 이 말을 덧붙였다.
그때의 은혜가 바로 지금을 말하는 건가? 자기가 차였다고 말하고, 나에게 마도구를 선물하고, 마지막으로 중립을 깨고 변호까지 해 주겠다니.
“인사만 하고 지내는 사이치고는 과분하지 않나요,
전하?”
언제는 아무것도 없는 사이라더니, 웬 심경의 변화일까. 그러고 보면 약혼 관계일 때보다 지금 아덴미르가 더 친밀하게 느껴지긴 했다. 우리 관계를 정의하자면…….
작게 되뇌던 아덴미르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누구도 우리를 친구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텐데.”
“호칭이 딱딱하잖아.
공녀, 전하 이렇게 부르는 건.”
서로의 사회적 위치가 위치니만큼 격식을 차리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아덴미르의 말도 제법 일리 있는 주장이었다. 뭐, 전 약혼 관계에서 친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아덴미르와 잘 지내는 게 좋았다.
“그럼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엘로디,
리리 아무거나 좋아요.”
“그럼 전 앞으로 아덴미르 님이라고 부를게요.
물론 사석에서만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황족인데,
이름만 부르는 건 좀…….”
약혼 사이일 때도 부르지 않았던 이름을 서로 부르려니 낯간지럽긴 하지만, 나쁘지만은 않았다. 좀 더 친해진 것 같기도 하고? . . . 서쪽 별채를 빠져나와 본성으로 향하는 길. 아덴미르는 엘로디와의 대화를 곱씹었다.
“그렇다고 침대 위에 웅크려서 훌쩍이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애도 아니고…….”
엘로디의 그 말을 듣는 순간, 과거 어느 날 어린 소녀와의 첫 만남이 떠오르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하지만 엘로디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때를 기억하는 게 오로지 저 혼자뿐이라는 사실이 어째서 충격인 것인가. 뒤이어 엘로디의 목소리가 마치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친밀한 관계를 이르는 듯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친구, 그 이상의 관계가 될 수 없다고 선을 그은 것이다. 그 안으로 들어올 생각 따위 하지 말라 벽을 세우는 것 같은데……. 순진하신 공녀님은 모르시겠지.

선을 긋고 벽을 치면 칠수록 그 벽을 무너뜨리고 싶어진다는 것을. 아덴미르는 인정했다. 엘로디가 그어 놓은 선 안에 침범하고 싶다는 것을. 우습게도 제 손으로 관계를 망친 후에야. *** 대회의는 내가 황성에 온 다음 날에 바로 열렸다. 장소는 황제가 국정 회의 시에 사용하는 대회의실이었다. 비어 있는 황좌 옆자리에는 살바트리체 황비가 앉아 있었고, 양옆으로 귀족들이 주르륵 앉아 있는 구도였다. 내 자리는 그들 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는 의자였다.
[자기들은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으면서 네 의자는 참으로 불편해 보임!]
탐욕의 말마따나 내 지정석은 쿠션이라고는 없는 딱딱한 나무 의자였다. 익숙한 얼굴이 곳곳에서 보였다. 건국제 때 그 난리 통에 있던 귀족들이었다. 내가 아니었으면 죽었을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 외에도 페르디아 공작을 비롯한 공작 부인과 두 아들의 모습도 보였고, 이번 대회의를 강력하게 주장한 앙겔로스 공작도 보였다.
작게 중얼거리며 의자 앞에 서자 바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살바트리체 황비와 눈이 마주쳤다. 벨트란과 결혼하면 폭행할 거라는 내 말을 떠올리기라도 한 건지 그녀는 눈매를 좁혔다.
황비의 말에 곁에 있던 시종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하면 건국제에 있었던 균열 사건에 대한 대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대회의가 시작되었다.
5–7 minutes

기다렸다는 듯 추궁이 날아들었다.
질문한 남자는 앙겔로스 공작 측 사람이었다.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일단은 모르쇠 전법이다.
“모른다니! 공녀는 지금 그게 답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당시에 있었던 일은 기억이 흐릿하여 떠오르는 게 없습니다.”
“설명할 수 없기에 모른다고 핑계 대는 것이지 않나?
필시 켕기는 게 있는 것이겠지!”
무시무시하게 쳐다보는 페르디아 공작의 눈길이 느껴지지도 않는 건지 남자는 쉴 새 없이 내게 질의를 가장한 고함을 버럭버럭 내질렀다. 예상했던 대로 앙겔로스 공작 세력은 초반부터 자신들에게 유리한 분위기를 만들려 시도했다. 다른 귀족 남성이 물었다.
부드러운 어조로 질문하고 있지만 저자 또한 앙겔로스 공작의 사람이었다.
그러자 다른 귀족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페르디아의 둘째가 권능을 발현하지 않았다는 건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나를 사이에 두고 설전이 벌어졌다. 이 또한 예상했던 전개이긴 했지만 심장이 벌렁거렸다. 권능이 있다는 게 알려지는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내 권능이 페르디아의 권능이 아닌 세베레스의 권능이라는 게 들킬까 봐 두려운 것이었다.
나는 흘긋 페르디아 가문 사람들이 있는 쪽을 보았다. 공작은 물론이고 얀시와 카를로트, 공작 부인까지 나를 보고 있었다. 카를로트는 권능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게 답답한지 인상을 쓰고 있었지만 용케도 참고 있었다. 그때 제 측근들에게만 맡기고 상황을 관망하던 앙겔로스 공작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군.
균열을 닫은 것이 공녀의 평판을 끌어올리기 위한 자작극이 아닌가……
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날뛰는 카를로트를 얀시가 제지했다. 나는 앙겔로스 공작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공녀가 이르칼라 교단의 끄나풀일 수도 있다는 의혹을 제시하는 바일세.”
술렁. 일순 좌중에 큰 동요가 일었다. 이르칼라 교단은 지상을 도탄에 빠트리려는 이르칼라 신을 추종하는 세력이었다. 의혹을 제시하는 것만으로 엄청난 불명예였다. 도무지 두고 볼 수 없었는지 존재감만 과시하던 페르디아 공작이 처음으로 발언했다.
페르디아 공작의 서늘한 시선을 마주 보며 앙겔로스 공작이 점잖은 얼굴로 미소 지었다.
금색의 눈동자가 고요히 타올랐다. 물론 페르디아 가의 명예를 위해서겠지만, 공작이 나를 위해 나섰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렇지만 페르디아 공작이 말을 얹을수록 무조건 딸을 감싼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었다. 나는 황급히 대화에 끼어들었다.
“앙겔로스 공께서도 아실 텐데요.
제단 주관을 맡은 것은 제가 아니라 공의 영애이신 레이디 앙겔로스였습니다.
저는 레이디 앙겔로스가 주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대리로 맡게 되었으니 공의 주장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숨을 고른 후 한마디 덧붙였다.
“공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레이디 앙겔로스야말로 이르칼라 교단의 끄나풀이 아님을 증명하셔야 할 테니까요.”
내가 이르칼라 교단 끄나풀이면 네 딸이 더 의심스럽지 않냐는 반격이었다. 하지만 앙겔로스 공작은 그런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양 조금의 동요도 없이 가볍게 받아쳤다.
“직전까지만 해도 건강하던 도로테아가 갑자기 쓰러졌지.
하면 이리 가정해 보면 어떤가.
누군가 몰래 도로테아에게 독을 썼다면?”
앙겔로스 공작이 독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자마자 좌중의 시선은 페르디아 공작 부인에게 쏠렸다. 이 자리에서 누구보다 독과 가까운 사람이라면 테미스 페르디아이니까.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름이 좋지 않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앙겔로스 공작에게 단호히 말했다.
부인까지 끌어들이려 할 줄은 몰랐다. 앙겔로스 공작의 목적은 오로지 나만 진창에 빠트리는 것만이 아닌 듯했다.
앙겔로스 공작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그는 침중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증거, 증거라…….
내 딸이 독에 당해서 정신을 잃었다는 의원의 소견이 있었다면 어떻겠나?”
또다시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증거가 있다고 하니 사람들의 일부분은 앙겔로스 공작의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믿는 기색이었다. 가문 주치의의 소견이란 얼마든지 조작 가능한데도.
나는 이 지지부진한 회의를 끝내는 방법을 알고 있다. 아주 간단하다. 구원자.
그 사실을 인정한다면 내가 이르칼라 교단의 끄나풀이라는 의혹을 말끔히 벗을 수 있었다. 신 이슈타르가 내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만은 명확하니까. 그게 빌어먹을 구원이든, 언니인 이르칼라를 적대하는 것이든 뭐든. 그것만큼 내가 보인 힘을 설명할 수 있는 이유가 있을까? 구원자라니 정말 귀찮고, 감투 같은 건 진심으로 쓰기 싫다.
단 한 번도 내게 친절한 적 없는 세계지만, 그래도 나는 이 땅 위에 살아 있었다. 나에게는 친딸이라 믿기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나를 지키기 위해 부상을 불사하는 아버지가 있고. 친딸도 아닌 나를 제 딸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어머니가 있으며. 지금도 나만을 쳐다보며 걱정하는 의심스러운 오라버니와 얄미운 남동생이 있다. 차원을 헤매며 결국 나를 찾아낸 한 남자와 내 편을 들어 주겠다는 어색한 친구도, 언제나 웃는 얼굴로 나를 보살펴 주는 친구도 있다. 무엇보다 나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친부모가 있는 이 세계를 외면할 수 없었다.
여긴 더 이상 책 속의 세계가 아니었다. 원작, 즉 전전생의 기억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그 기억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었다. 설령 이게 정말로 누군가 쓴 소설 속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해도, 상관없어. 주인공은 나니까. 내 삶은 내 거다. 나는 사선에 앉은 앙겔로스 공작을 똑바로 바라보며 호전적인 미소를 지었다.
나는 남자 귀족의 말을 무참히 끊으며 선언했다.
대답도, 웅성거림도 없었다. 직후 이어진 건 오로지 적요였다. 이윽고 앙겔로스 공작이 침묵을 깨며 물었다.
“기억이라고는 나지 않는다더니,
구원자라 주장하는 것인가?
그 또한 이슈타르 신전 측의 일방적인 주장이라 알고 있네만.”
“기억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의식이 사라지기 직전 이슈타르 신의 계시를 들었습니다.”
나의 아이야. 너의 힘에 의심을 품지 말라. 너의 힘에 한계를 두지 말라. 그 음성을 들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신의 음성이 들리는 순간 4대 가문의 사람들과 이슈타르의 신관들이 동시에 반응했으니까. 그때 아덴미르가 덤덤하게 말했다.
뒤이어 페르디아 공작도 인정했다.
얀시와 카를로트도 말을 얹었다.
“분명 신성한 음성이었지요.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니.”
당시 대광장에 있었던 4대 가문 사람들의 증명이 이어졌다.
접점이라고는 없는 크룬델 공작까지? 조금 놀랐다. 이로써 권능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신의 음성을 들었노라 인정했다. 앙겔로스 공작을 제외하고. 그때 회의장의 문이 열렸다.
마지막으로 음성을 들었노라 인정한 것은 이슈타르 신전의 대신관이었다.
“몸을 바쳐 균열을 막은 구원자를 이르칼라 교단의 끄나풀이라 의심하다니,
이는 신에 대한 모독입니다.”
누구보다 이슈타르와 가까운 대신관마저 인정하였으니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나는 표정 관리하느라 힘들어 보이는 앙겔로스 공작에게 물었다.
“4대 가문의 핏줄과 신관들이라면 모두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는데,
어째서 앙겔로스 공만 묵묵부답인가요?”
분명 앙겔로스 공작도 들었을 텐데, 왜 의심스러운 얼굴을 하는 거지? 주변을 휘 둘러본 앙겔로스 공작이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앙겔로스 공작의 시인과 함께 상황은 깔끔하게 종결되었다. 엘로디 페르디아는 이슈타르가 선택한 구원자다. 그 명제를 뒤집지 않는 이상 내게 어떤 의혹도 뒤집어씌울 수 없을 테니까. 사람들은 아까와는 다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의구심, 선망, 시기 그 밖의 여러 감정이 섞인.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페르디아 공작이 거침없이 내게 다가왔다.
공작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검사 특유의 굳은살이 박인, 거칠고 커다란 손이었다.

그 순간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서늘했지만 다정한 그 손을 맞잡았다. *** 페르디아 저택으로 돌아온 그 날, 집사가 나를 찾아왔다.
저번 만찬으로부터 겨우 보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벌써 가족 만찬이라니. 그러고 보니 전보다 가족들과의 만찬 기간이 부쩍 줄어든 것 같기도 했다. 이번 대회의 건에 대해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걸까.
만찬을 위해 격식에 맞는 의복을 갖추고 나니 어느새 저녁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침대 위에 있는 탐욕을 돌아보았다.
“밤에 과자 줄게. 그러니까 얌전히 봉인석에 들어가 있어.”
사람 음식에 맛 들여 버린 탐욕을 봉인석에 넣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내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곧바로 들어온 페르디아 공작까지 착석했다. 늘 그렇듯 대화가 거의 없는 조용한 식사 시간이었다.
“대회의가 무사히 넘어가서 다행이네요.
그렇지,
리리?”
간단한 말만 오고 간 이후 디저트가 나왔다. 그때까지도 페르디아 공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커피를 한 모금 넘긴 페르디아 공작이 내게 물었다.
“엘로디. 해가 지나면 네 생일이지 않으냐.
받고 싶은 게 있다면 말하거라.”
그 말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지금 꼭 해야 할 말이 있음을.
무관심하던 과거와 달리, 내게 신경 쓰는 가족들을 보며 결심했다. 거짓으로 점철된 채 가족들 사이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다고. 나는 잠깐 심호흡을 한 후 입을 열었다.
5–7 minutes
싸아아-. 숨 막히는 정적이 펼쳐졌다. 칼날 같은 시선이 내게 날아와 꽂혔다.
쉽게 내뱉은 말이 아니니만큼 긴장감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어쩐지 흉흉한 눈으로 나를 보는 세 쌍의 눈동자와 한숨을 내쉬며 감아 버리는 한 쌍의 눈동자. 결국 나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제 저도 성인이고,
제 앞가림 정도는 거뜬히 할 수 있으니까,
저택을 나가-.”
내 말을 끊은 것은 페르디아 공작이었다. 직후 공작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뒤이어 얀시가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마치 내가 독립하도록 옆에서 속살거린 누군가가 있을 거라 확신하는 말투였다. 마지막으로 카를로트까지 인상을 팍 쓰면서 한마디 거들었다.
카를로트는 아예 내 독립 선언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가출 취급하고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단번에 허락받기 힘들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이야. 페르디아 세 남자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기분이란, 아득하기 그지없었다.

***
엘로디가 그 말을 하는 순간 테미스 페르디아는 생각했다.
엘로디가 음독하면서까지 돈을 모은 이유가 독립하기 위해서라는 말을 들은 그날부터 테미스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고 생각했다. 나를 알아달라는 듯 소동을 피우던 엘로디가 더는 사고 치지 않고,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 눈을 하고 나타났을 때부터 오늘은 올 수밖에 없던 거겠지. 관심받는 것마저 포기할 정도로 페르디아에 대한 미련이 사라진 것일 테니까. 뭔가 잘못되었다고 깨달은 테미스가 뒤늦게 여러 노력을 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가문의 일원임을 느낄 수 있도록 가족 외식을 꾀하고, 전보다 자주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최근 들어 우리가 친해졌다고 생각하는 건 단지 나만의 착각이었나.’
언젠가는 어머니라고 불러 주길 기다리고 있었건만. 게다가 독립을 선언한 시기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랐다. 지금까지 만들었던 해독제에 대한 로열티는 모두 지급했지만, 다 합쳐도 독립하기에 충분한 자금은 아니었다. 평생을 대귀족의 영양으로 살아온 엘로디에게는 하루 탕진할 정도의 돈일 터였다. 테미스는 남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남들은 싸늘하게 굳은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화가 난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얼굴을 오랫동안 봐 온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랬다. 천하의 실베스터 페르디아 공작은, 당황했다. 딸의 난데없는 독립 선언에.
“말도 안 되는 소리.
나가서 살기에 너는 아직 어리다,
엘로디.”
엘로디의 말마따나 천지 분간도 못 할 정도로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그녀의 동년배 중에는 이미 결혼한 귀족 영애들도 많았고, 집안 사정이 좋지 않은 여식들은 저보다 더 신분 높은 이들의 시녀로 일하며 집을 얻어 나가는 일도 있었다. 그러니 어리다는 건 반대할 이유가 되지 못했다. 페르디아 공작도 이성을 되찾았다. 그는 엘로디의 독립 선언을 단순한 치기나 변덕 정도로 생각했다. 사춘기는 이미 지난 걸로 알고 있는데. 그는 자못 삭막한 어조로 딸에게 물었다.
“독립을 한다는 건,
더 이상 가문의 지원을 받지 않겠다는 의미다.
알고 있겠지?”
당연히 말로만 하는 압박이었다. 평생을 제 그늘 아래서 곱게 자란 엘로디가 제대로 독립할 수 있을 리 만무하므로. 하지만 엘로디는 예상했다는 듯 담담하게 답했다.
“네. 지원은 괜찮아요.
모아 둔 돈이 있거든요.
아, 가문과는 상관없이 제가 따로 저축한 자금이니 염려 안 하셔도 돼요.”
말문이 턱 막혔다. 페르디아 공작은 물론이고 얀시와 카를로트마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본격적이다. 장난이 아니었다. 특히 얀시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리리 아르셀이라는 다른 신분을 만들어서 투자하고 다닌 게, 몰래 독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 왜 굳이 다른 신분이었냐 하는 의문이 비로소 풀렸다. 입술을 달싹이던 카를로트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잔뜩 흥분해서는 외쳤다.
“아, 암살자!
암살자는 어쩌려고?
누님, 저번에 습격당한 거 잊었어?
또 습격하지 말란 법도 없잖아!”
“아무리 강한 용병이라고 해도 가문 사병만 하겠어?
너무 위험해.
그만둬.”
일견 일리 있는 말이었으나 엘로디가 차분하게 반박했다.
“페르디아에서 손꼽히게 강하다는 네가 상대하기도 벅찼던 살수들이었는데,
저택에 있다고 안전하리라는 보장은 없어.”
엘로디의 손을 놓쳤던 그때를 떠올린 카를로트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나도 목숨 아까운 줄은 아니까,
신변에 각별히 신경 쓸 거야.
여차하면 신전에 성기사 파견을 요청할 생각도 있고.”
“명색이 이슈타르의 구원자라고 하니까 신전에서 호위 정도는 보내 주겠지.”
엘로디가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이슈타르의 성기사나 페르디아의 사병이나 전력은 비슷하기에 더 이상 안전을 핑계 댈 수 없었다. 카를로트로서도 할 말이 없었지만, 마지막으로 질척대었다.
“내가 더 열심히 수련하면 되잖아…….
누님, 내가 지켜 줄게.”
엘로디가 상냥하게 웃으며 거부하자 카를로트의 눈꼬리가 축 내려갔다. 여전히 굳은 낯을 한 채 얀시가 물었다.
짤막한 대답에서 엘로디의 의지가 드러났다. 얀시는 굳은 제 입매를 매만졌다. 그에게는 제 감정을 웃음으로 숨기는 것이 무엇보다 쉬운 일이었다.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요즘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신경 쓰이는 여동생을 관찰하고 있노라면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모순적이게도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뻔히 들여다보이는 듯하면서도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용병 이안이 옆에서 헛소리를 지껄였을 거라 여겼는데,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얀시가 궁금한 것은 엘로디의 진심이었다.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엘로디는 이번에도 침착하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 없으니까…….”
“그건, 제가 페르디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리고…….”
엘로디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뚝.
뚝, 뚝……. 굵은 눈물이 손등 위로 떨어졌다.
당황한 엘로디가 맨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저도 왜 울고 있는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쏟아지는 눈물은 도무지 멈추지 않았다. 그곳의 모든 사람은 충격을 받았다. 울음도 내지 않고 소리 죽여 눈물만 뚝뚝 흘리는 엘로디의 모습에.
그러나 한 번 터진 울음이 쉬이 그칠 리가 없었다. 그 안쓰러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테미스가 엘로디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리리. 먼저 올라가도 좋단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또 하는 게 좋겠구나.”
엘로디가 식당을 빠져나가는 동안 다이닝룸에는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림자처럼 구석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사용인들 또한 눈치를 보며 최대한 숨을 죽였다.
그때 안쪽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 풋맨이 디저트를 내오기 위해 카트를 끌고 나오다가 가로막혔다.
사용인들이 속닥거리는 걸 들은 얀시가 손을 들어 그들을 불러들였다. 그들은 서둘러 디저트를 세팅하고 다이닝룸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 누구도 디저트에 손을 대지 않았다. 얀시는 녹아 가는 아이스크림을 내려다보다 어머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놀라지 않으시는 걸 보니 어머니는 알고 계셨네요.
이번에도.”
“역시 눈치가 빠르구나,
얀시. 그래. 알고 있었단다.”
테미스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카를로트가 끼어들어 외쳤다.
테미스가 실소를 터트리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지난여름, 처음 엘로디와 티타임을 가졌을 때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냉차를 비워 낸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상대가 대륙 제일의 독제사인데도, 상관없다는 듯. 누구든 자신과 티타임을 가진다면 앞에 있는 찻잔에는 들어 올리는 시늉만 하는데도. 그건 제 권능을 신뢰한 것일까, 아니면 테미스 페르디아라는 사람을 신뢰한 것일까. 테미스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상상이 가니? 온몸의 장기가 타들어 가는 듯하고 머리가 돌아가지도 않을 정도로 지독한 두통이 덮치는 고통이.
난 멋도 모르고 수십 병의 독을 그 아이에게 주었어.
리리는 꼬박꼬박 해독제를 내게 가지고 왔고.”
“수십 번을 마셨다는 이야기란다.
수십 번은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을 겪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내 독이 얼마나 효과 좋은 극독인지는 다들 알 테지.”
모두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지만 같은 생각을 했다. 엘로디는 그런 고통마저 감내해서 벗어나고 싶을 정도로, 페르디아에 있는 게 끔찍한 거다.
“처음 음독해야 해독제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내게 들켰을 때 그 아이가 그러더구나.
독립 자금을 모으려고 그랬다고.”
얀시가 눈을 내리깔며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페르디아의 물건은 단 하나도 들고 가고 싶지 않았던 거네요.
리리는.”
처음부터 엘로디 페르디아는 겉도는 아이였다. 갓난아이 때부터 페르디아에서 자랐지만 별채에서 유모 손으로 키워졌다. 실베스터는 양육으로 제 책임을 다한다고 여겼고, 얀시는 가식적이나마 다정하게 대해 주었으며, 카를로트는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르고 미워했다. 테미스는 남편과의 약속을 지켰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엘로디는 제대로 울지도 못하는 아이로 자랐다.
테미스는 자조하며 남편을 똑바로 응시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표정만 굳히고 있는 꼴이 볼만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으나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했었다. 엘로디가 두 사람에게 마도구를 선물했던 날이었다.
그때 그가 뭐라고 했던가.
실베스터는 성가시다는 듯 말을 돌렸다. 오늘의 독립 선언은 그 업보였다.
테미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무릎을 꿇든, 환심을 사든, 울며 매달리든. 이미 늦었지만, 지금보다 더 늦기 전에.

6–8 minutes
창밖에는 진작 땅거미가 물러가고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굳게 닫힌 복도 창문이 세찬 밤바람에 가늘게 진동했다. 오늘 밤 한바탕 비바람이 몰아칠 것만 같은 궂은 날씨였다. 침실로 돌아가는 길. 사용인들이 지나가지 않는 복도는 적막했다. 복도 중간중간 일렁이는 촛불에 드리운 내 그림자도 함께 흔들렸다. 잠자코 계단을 올라가던 중, 조용하던 탐욕이 불쑥 말을 걸었다.
짧게 고민하던 나는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울음은 어느새 그친 지 오래였다. 북받치던 감정도 어느 정도 잠잠해진 후였다. 나는 복도 한가운데에 멀거니 멈춰 서서 아까 다이닝룸에서의 대화를 떠올렸다.
얀시의 질문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분명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 없으니까…….”
“그건, 제가 페르디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리고…….”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 말에 대답하면서 이상하게도 지난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엘로디 페르디아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순간을 수도 없이 맞닥뜨렸다. 분명 나는 페르디아인데, 왜 나 혼자만 별채에서 살고 있는 걸까? 다른 가족들은 어째서 본 저택에서 살고 있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눈에 비친 본 저택은 너무나도 크고 근사해서 꼭 동화 속에 나오는 황제의 성 같았다. 언젠가는 너무 궁금해서 사용인들에게 물어보아도 그들은 난감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러다 처음 사생아라는 단어의 뜻을 알게 되었다.
내 피를 모조리 뽑아내어 갈아 끼우지 않는 이상 이 사실은 불변할 테지.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반쪽짜리라도 페르디아는 페르디아라 물질적으로 모자란 것 없이 풍족하게 자랐다. 다른 가문의 영애들은 예약 후 몇 년이나 기다려야 맞출 수 있다는 의상실의 드레스는 내가 손짓만 하면 바로 준비되었다. 별채에 딸린 주방장은 무려 황실 셰프 출신이었다. 가정 교사들마저 아카데미 교수 출신들이라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사생아라고 알고 있는 아이에게 그 정도로 투자했으니 페르디아 공작도 할 만큼 했다고 볼 수 있었다. 배가 부른지도 모르고 언제나 아버지가 나를 만나러 오기만을 기다렸던 내가 철이 없었지. 그 이후로도 여러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태어나 처음 참여한 가족 식사에서 아무도 내게 말을 걸어 주지 않았던 날. 유일하게 나를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줄 알았던 얀시가 이성을 잃고 나에게 꺼지라고 소리쳤던 날. 카를로트가 인상을 쓰며 더러운 사생아와 닿기 싫다며 말했던 날. 아무도 오지 않는 별채 퇴창에 웅크리고 앉아 본 저택이 있는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어느 날……. 그런 날들. 나는 그 기억을 한 단어로 갈무리했다.
외따로 떨어진 섬에 홀로 표류하고 있는 것 같은 막막한 감정이었다. 저 멀리 사람이 사는 큰 섬이 보이지만, 내게는 그곳까지 갈 조각배조차 없다. 하물며 지탱할 나무판자도.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언젠가의 엘로디가 꿈꿨던 것처럼 나는 본 저택에 들어올 수 있었고, 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괴로운 마음이 드는 걸까. 바라던 대로 되었지만, 그건 더 이상 내 소망이 아니었다.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내가 예전의 내가 될 수는 없다. 우스웠다. 그들에게 기대하고 상처받는 내가.
진짜 가족이 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모순된 감정을 품는 내게 자기혐오가 들었다. 힘없이 웃으며 다시 고요한 복도에 발을 내디딜 때였다.
탐욕이 내뱉은 말은 뜻밖이었다.
이래 봬도 이르칼라 님을 부르짖다가 무려 나를 죽일 뻔한 전적이 있는 죄악이니까.
[이르칼라 님은 나를 만든 주인님이니 당연함.
나는 그분을 정말 사랑함.
그래서 이르칼라 님 명령대로 열심히 지상에 내려와 임무를 수행했음.]
지상에 내려와 세계를 파멸로 몰고 갔다는 고리짝적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열심히 일했는데……
인간 놈한테 봉인 당해 버렸음.
그때 이르칼라 님이 기다리면 언젠가 나를 구하러 온다고 그랬음.
나는 시간이 멈춘,
허물어진 신전에서 오래,
정말 오래오래 기다렸음.]
문득 탐욕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바람도 멈춘 듯한 광활하고 쓸쓸한 신전 한구석에 탐욕은 홀로 존재했다. 본 저택이 있는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어린 내가 떠올라 어쩐지 웃음이 났다.
그 이후로 탐욕은 말이 없었다. 사색에라도 잠긴 모양이었다. 다시 침실로 향하면서, 나 또한 생각에 잠겼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던 건, 내가 그들에게 감정이 남아 있다는 의미였다. 너무 복합적이라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그런 감정. 더 이상 남은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독립을 말리는 공작과 두 아들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마냥 어리지는 않지만 사회 경험이 없는 내가 독립한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을 테고, 아무리 성기사고 용병단이고 해 봤자 페르디아만큼 안전한 곳은 없으니까. 더구나 지금 내가 처한 상황도 단순하지만은 않았고. 자기합리화를 하며 꼭 독립해야 하는지 의구심이 들수록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함께 커졌다. 닿을 수 없다고 생각한 존재들이 나를 붙잡으니 괜히 대단한 존재라도 된 도취감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걸까?
나는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눈가를 벅벅 문질러 닦고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울고만 있기에 타칭 구원자는 너무 바빴다.

*** 머리가 복잡할 때는 다른 일로 생각을 돌리는 게 가장 좋다. 침실에 돌아온 나는 밀려 있는 문서를 하나씩 살폈다. 첫 번째는 마리오에게서 받았던 땅과 집문서였다.
주로 귀족들이 별장용으로 찾는 작은 저택이었다. 혼자 살기에 다소 넓은 감이 있지만, 어차피 돈도 많으니 집안일을 도울 사람을 들이면 그만이다. 위치는 내가 미리 말했던 대로 항구 쪽이었다.
두 번째는 크룬델 공작에 대해 나름대로 정리해 본 보고서였다. 하지만 알고 있는 정보가 별로 없어서 종이 한 장도 다 채우지 못했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때마침 통신 마도구가 반응했다. 통신을 시도한 상대는 다름 아닌 레이안이었다. 마침 의뢰를 고민하고 있던 터라 기막힌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건국제 이후로 몇 차례 마도구로 연락한 것 말고는 만난 적이 없으니 오래 못 보기는 했다.
잠깐 뜸을 들이던 레이안이 물었다.
“그보다 의뢰 하나만 맡아 줄 수 있어?
크룬델 공작,
조사 좀 부탁할게.”
레이안은 왜 크룬델 공작을 조사하는지 되묻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괜히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되니 편했다.
통신을 해제하려는 그때였다.
내 애칭을 부르는 나직한 음성에 흠칫하며 되물었다.
뜻밖의 질문이었다. 크룬델 공작의 의뢰를 맡기는 이유는 물어보지 않으면서 이런 개인적인 질문을 할 줄은 몰랐으니까. 목소리만 듣고도 물어볼 정도면 나도 모르게 동요하는 티를 내긴 낸 듯싶었다. 괜히 민망해서 뺨을 문지르며 되물었다.
레이안은 나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도 모르는 다른 나를 가장 많이 만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런 개인적인 일 정도야 못 말해 줄 이유가 없지. 우린 동맹 관계니까. 잠깐 침묵이 흘렀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이내 레이안의 낮은 음성이 마도구 너머에서 들려왔다.
두 마디 말뿐이지만 충분한 위로였다. *** 혼자만의 시간은 그렇게 오래 가지 못했다. ‘나 화났소’ 광고하듯 엄청나게 쾅쾅대며 침실에 들어온 마사 때문이었다.
꽤 넓은 저택인데도 소문이 금방 돌았다. 아까 식당에서 있었던 일이 벌써 사용인들 사이에 쫙 퍼진 모양이었다. 마사가 득달같이 달려와 물었다.
“독립하겠다고 말씀드린 건 맞아.
허락까지는 못 받았지만.”
나는 대답 대신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그러자 마사가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마사. 마사도 어릴 때부터 여기 살았고,
또 페르디아 저택이 근무 환경도 더 좋기도 하고…….”
“엄마도 없는데 제가 왜 여기 남아 있었는지 아세요?
아가씨 때문이에요.”
“저마저 떠나면 아가씨는 혼자일 테니까,
떠날 수 없었던 거라고요.
그런데 이렇게 상의도 없이 떠난다고 하시면 저는 어떡해요?”
막연히 마사가 이곳에 남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한 건 나만의 판단이었다. 페르디아 가문의 하녀 자리는 다들 들어오고 싶어 할 정도로 대우가 좋기로 유명하기도 하니까. 내가 안일했다. 유모와 마사가 있었기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는데.
아직 뾰로통한 얼굴이지만 이 정도로 넘어가 줄 모양이었다. 나는 그 틈을 타 장난스럽게 물었다.
공과 사 하나는 확실한 마사였다. 우리의 대화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누군가 노크했다. 들어온 사람들은 본 저택의 사용인들이었다.
한 명도 아니고 수많은 사용인이 내 침실 안에 와글와글 몰려 있었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시녀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낯이 익지만 이름은 모르는 하녀 한 명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혹시 저희의 불순한 태도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인가요?”
그녀의 말을 시작으로 다른 사용인들도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이 이어질수록 나는 민망해졌다.
비록 내 뒷이야기를 했다는 이유긴 하지만 사용인들에게 버럭버럭 화를 내며 온갖 짜증을 부린 건 맞으니까.
“아가씨가 본 저택으로 들어오시고 저택 분위기가 한층 밝아졌다고요!”
그들은 입에 발린 말을 잘도 했다. 그래도 듣는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 다음 날, 나는 페르디아 공작과 마주 앉았다.
마지막 대화가 난데없는 나의 울음이었던 만큼 공작과 나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괜히 목이 타 앞에 놓인 차만 홀짝거리며 마셨다. 그러다 슬쩍 시선을 올렸다가 페르디아 공작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콜록, 콜록! 뜬금없는 말에 사레가 들린 나는 기침을 터트리며 되물었다.
그러면서 공작이 내 앞에 턱 내려놓은 것은 광산 양도 계약서였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인 듯했다.
탐욕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재산을 보면 현실감이 들지 않기 마련이다.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나는 아연한 얼굴로 페르디아 공작을 불렀다.
지난밤, 잠도 못 이루고 뒤척이며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모두 밝히기로. 내가 당신의 자식이 아니며, 세베레스 공작의 친딸이라고. 더 이상 가족들을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 속에 살고 싶지 않았다. 다른 이야기를 하려면 우선 이걸 밝히고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게 심호흡한 나는 어렵사리 입술을 떼었다.
사실을 말하기도 전이었다. 페르디아 공작이 내 말을 가로채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5–7 minutes

나는 두 눈을 크게 뜨며 페르디아 공작을 보았다. 그는 더없이 여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놀란 건 나뿐이었다. 나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애초에 내가 세베레스 공작의 딸인 걸 알면서 가문에 받아들였다는 소리였다.
나는 공작 앞에서 내 친모에 대해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금기를 깨고 물었다.
“그럼 엄마는 아버지,
아니, 각하의 정부가 아니었던 거예요?”
흠칫, 공작이 조금 동요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아버지가 아닌 각하라고 불러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대놓고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그 이유는 중요치 않았다.
잠깐 눈을 감은 페르디아 공작이 읊조리듯 말했다.
세베레스 공작의 과거를 보았을 때, 페르디아 공작이 엄마에게 구애했다는 대화를 들은 적 있기에 혼자 추측했다. 엄마가 페르디아 공작에게 나를 당신의 딸이라 속이고 나를 맡겼을 거라고. 그러나 멋모르는 건 나였다.
“그녀가 너를 내게 부탁했고,
나는 받아들였다.
그뿐이야.”
도대체 엄마와 무슨 관계였기에 이런 부탁을 들어준 것일까. 공작은 더 이상 설명하고 싶어 하는 얼굴이 아니었지만, 나는 달랐다. 내막을 알아야겠다.
“그럼 왜 엄마가 정부가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으셨어요?
각하의 명성에도 금이 갔는데요.”
공작의 말대로였다. 황가와 4대 가문은 특히 대대로 권능이 이어지는 만큼 기이하리만치 핏줄에 집착했다. 그러니 나를 자식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반이나마 페르디아의 피가 흘러야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페르디아로서 자랄 수 없었겠지.
“어찌 말하겠느냐?
네가 사실 내 친딸이 아니라고.
쉬이 받아들였겠느냐?”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꾹 닫아 버렸다. 말하지 못했던 이유를 이해했다. 쉽게 꺼내기에 어려운 주제니까. 하지만 역시 친딸도 아닌 나를 바깥에서 사생아를 만들어 왔다는 오명까지 뒤집어써 가면서 키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 말하지 않았는지 의아했지만, 그건 부부의 일이므로 내가 관여할 게 아니었다.
“그럼 이야기해 주세요.
제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전부.”
이 정도는 말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공작을 빤히 응시했다.
정말로 내키지 않는지 옅은 한숨을 내쉰 공작이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19년 전, 페르디아 수도 저택. 페르디아 기사단의 단장 교체와 더불어 개편으로 일거리가 몰아쳤다. 실베스터는 집무실에 틀어박혀 쌓인 서류를 검토하는 중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집중을 깨트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서류에서 눈을 뗀 실베스터는 어느덧 밤이 깊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사가 들어와 고개를 조아리며 보고했다.
실베스터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창밖을 보았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깊은 밤이었다. 투투둑, 툭, 툭. 세찬 비바람이 외창을 난타한 후 소란스럽게 떨어져 내리는 중이었다. 야심한 시각, 궂은 날씨에 방문한 손님이라…….
실베스터의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드러나자 집사가 서둘러 덧붙였다.
“예. 아르셀리아라는 분입니다만 비에 잔뜩 젖으신 터라 허락도 받지 않고 응접실을 내어드렸-.”
끼익. 집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자에 걸쳐 두었던 외투를 집어 들고 실베스터는 곧장 큰 보폭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당황한 집사가 그 뒤를 따랐다.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찾아온 여성이라 혹 쓸데없는 소문이라도 날까 봐 인적이 드문 구석 응접실로 안내했다. 실베스터는 노크를 하고 기다릴 새도 없이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에 아르셀리아가 있었다. 그녀는 비를 잔뜩 맞고 왔다는 말이 진실인지 수건으로 젖은 머리칼을 닦고 있었다.
사랑했던, 아니, 사랑하는 여자였다. 무릎을 꿇고 나를 받아 달라 처절하게 구애한 후 거절당한 이후로 처음이었다. 추한 과거를 떠올린 실베스터가 실소를 터트리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리하르트 세베레스가 이유불명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은 들었다. 그 이후로 연인이었던 아르셀리아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실베스터 또한 사람을 풀어 행적을 좇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그 앞에 나타난 것이다.
아르셀리아가 옅게 웃으며 소파 옆 어딘가를 내려다보았다. 실베스터의 시선도 함께 옮겨 갔다. 새근새근……. 강보에 싸여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게 뭔지는 알아볼 수 있었다.
실베스터의 말끝이 흐려졌다. 아이를 낳았군. 누구의 아이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감상은 그게 전부였다. 리하르트 세베레스의 자식에게 내어줄 관심은 남아 있지 않았다. 갑자기 찾아온 첫사랑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으므로.
실베스터는 일부러 매정한 어조로 물었다. 우리 둘 사이에 어떤 감정도 개입하지 못한다는 듯.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하잘것없는 발악 같은 것이었다. 들고 있던 수건을 만지작거리던 아르셀리아가 결심한 듯 입술을 떼었다.
“염치없게도 각하의 목숨을 구해 드린 값을 받으러 왔어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변명처럼 중얼거리는 모습이 그저 처연했다. 금방이라도 안개처럼 사라질 듯 여리디여렸다. 목숨값까지 입에 담을 정도로 절박한 사연이 대체 무엇일까. 못 들어줄 것도 없었다. 아니, 목숨값 운운하지 않았더라도 그녀가 바란다면 결국 노예처럼 빌빌 기며 무엇이든 들어주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 텐데도 굳이 목숨값을 입에 담은 이유라면 한 가지밖에 없었다. 무엇도 당신에게는 이유 없이 빚지고 싶지 않다고 선을 긋는 것일 테지. 실베스터는 아르셀리아의 모습을 눈에 똑똑히 박아 넣으며 물었다.
아, 그래. 아이가 있었지. 실베스터는 새삼스럽게 아이의 존재를 인지했다. 아르셀리아가 주먹을 꽉 말아 쥐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언젠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아이를 부탁해요.
각하라면 제 부탁을 들어주시리라 믿어요.”
아르셀리아는 지친 미소를 지었다. 실베스터는 더 캐물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럴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니까. 그녀는 선고를 기다리듯 간절한 얼굴로 실베스터를 바라보았다.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첫사랑이 다른 남자와 낳은 아이를 데려와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는 이 상황에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핏덩이 하나쯤이야 못 키울 것도 없었다. 페르디아가 아닌가. 실베스터가 허락하자 초조하던 아르셀리아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그것도 잠시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제 아내와 만나겠다는 아르셀리아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아르셀리아를 잊지 못했지만 가문의 존속을 위해 결혼은 불가피했다.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고 있는 등신에게 먼저 결혼을 제의한 것이 바로 테미스였다.
“남편의 사랑 따위는 필요 없어요.
제가 바라는 건 페르디아라는 권력과 공작 부인이라는 지위입니다.
각하께서도 사랑을 바라는 아내를 들이고 싶지는 않으실 테니 저를 선택하세요.”
“그럼요. 각하께서는 죄책감 없이 다른 여인을 사랑하세요.
저는 제가 바라는 것을 얻을 테니.”
애정 없는, 서로의 이득만을 위한 결혼이었다. 테미스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두 사람이 만나는 건 상관없겠지만, 그 자신이 껄끄러웠다.
아르셀리아가 습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아직도 물이 뚝뚝 떨어지는 후드를 썼다. 실베스터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를 내려다보는 아르셀리아의 시선이 애틋했다. 얼마나 제 아기를 사랑하는지 제삼자인 실베스터 또한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아르셀리아의 대답도 듣지 않고 말했다.
일종의 적선 같은 호의였다. 가진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여자에게 그 정도 해 주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잠깐 머뭇거리던 아르셀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건이 끝났으니 응접실을 나가려던 실베스터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잠에서 깨었는지 강보 밖으로 버둥거리는 통통한 팔이 보였다. 그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여자아이로군. 그래도 얼굴 한 번쯤은 보아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강보로 다가갔다. 아르셀리아가 강보를 젖혀 그에게 아이를 보여 주었다.

아르셀리아와 리하르트 세베레스 사이에서 난 딸. 엘로디 세베레스였어야 하는 아이. 하지만 가주인 리하르트가 깨어나지 못하는 이상 직계로 인정받을 수 없을 것이다.
처음 보는 사람이 신기한지 엘로디는 말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배시시 웃었다. 실베스터는 당황했다. 제 자식인 얀시는 갓난아이일 때 이렇게 저를 보고 웃은 적이 없었으므로.
아이가 두 팔을 그에게로 힘껏 뻗었다. 그 바람에 손끝이 그의 손가락에 스쳤다. 고작 찰나였을 뿐인데 감전이라도 된 듯 닿은 부위가 찌릿거렸다.
실베스터는 아르셀리아를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엘로디 세베레스. 그러나 이 아이는 페르디아로 자라게 될 것이다. 부탁받은 것은 아이를 돌봐 달라는 것이니 가문에 입적시킬 필요는 없었다. 다소 충동적인 결정이지만 마음에 들었다. 치졸할지도 모르지만 리하르트 세베레스에게 복수했다는 고양감이 일었다. 그 인간이라면 분명 제 아이를 끔찍이 사랑할 텐데, 아버지 자리를 그가 꿰차 버렸으니. 분명 그 이유 때문일 텐데, 방긋 웃는 아기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 왜인가. 그렇게 실베스터는 아르셀리아에게 약조했다. 돌아올 때까지 아이를 잘 보살펴 주겠다고. 그런데…….
지금 와서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6–7 minutes

여전히 세찬 비가 창가를 때리고 있었다. 적막 대신 빗소리로나마 소리를 채워 주니 경직된 분위기가 조금은 풀어졌다. 어떻게 페르디아 공작이 나를 맡아 키우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문득 얀시가 내 권능에 의구심을 가지고 끈질기게 물고 넘어질 때, 제지하던 공작이 떠올랐다.
‘내 권능에 대해 다 알면서 별말 안 하고 넘어간 거구나.’
일부러 속아 준 거였다. 내 권능이 파괴 속성이 아니라는 걸. 사실을 알고 나니 그동안 이상하게 여겨졌던 페르디아 공작의 행동이 이해되었다.
“아르셀리아…… 네 친모는 리하르트 세베레스의 연인이었으나 결혼하지는 못했다.
가신들이 격렬히 반대했기 때문이라더구나.”
별다른 설명 없이 곧바로 이해했다. 자신들이 위대한 4대 가문의 일원이라는 생각에 가득 찬 세베레스의 가신들이 평민을 가주의 부인으로 인정했을 리 없었다.
“설령 배 속의 아이가 리하르트 세베레스의 아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증명해 줄 가주가 혼수상태에 빠졌으니 아르셀리아도 세베레스에 머물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를 가진 것도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더구나.
나 또한 네 친모가 나를 찾아와서야 출산했다는 걸 알았으니.”
어째서인지 공작의 얼굴이 쓸쓸해 보였다.
잊지 못한 첫사랑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데리고 찾아온 그 기분은 어땠을까.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나지막한 한숨을 내쉰 공작이 말을 덧붙였다.
“네 친모가 떠난 직후 사람을 붙였으나 어느 순간 따돌리고 사라졌다.
그 이후로 자취를 감추었지.”
암흑가의 수장인 페르디아 공작의 수색망에 걸리지 않을 정도이니 내가 엄마를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슈타르도 엄마가 ‘닿을 수 없는 깊은 곳’에 있다고 말했고. 또 침묵이 이어졌다. 이번에 침묵을 깨트린 건 나였다.
“친딸도 아닌 저를 지금까지 키워 주셨는데,
원망스러운 건 왜일까요.”
나는 내가 주제 파악을 잘하는 아이라고 늘 생각해 왔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기점부터 스스로에게 ‘너는 페르디아가 아니야’라며 주문을 걸었다. 그건 자기방어였다. 비참해지지 않기 위한. 죽고 싶지도, 쫓겨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럴 바엔 차라리 내 발로 여길 나가자. 그렇게 차근차근 버려질 준비를 했다.
“저는 각하께서 왜 반대하시는지 모르겠어요.
페르디아가 아니니까 제가 이곳에 있을 이유는 더 없잖아요.”
나를 응시하는 페르디아 공작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던 공작이 내놓은 건 짧은 한마디였다.
거짓말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눈앞에 있는 페르디아 공작의 모습이 너무나도 처참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굳건한 태산 같기만 하던 페르디아 공작이,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회한에 잠기다니……. 진심이 아니라고 의심할 수도 없었다.
“모자람 없이 키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만하면 되었지,
그래, 그렇게 생각했던 것도 맞아.
보살펴 달라는 부탁에 너를 내 딸로 입적시키기까지 했으니 할 일을 다 했다고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정작, 너는…….”
고해성사하듯 읊조리던 페르디아 공작은 미처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순간 하필 위험하던 순간 몸을 던져 나를 감싸던 온기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잠깐 머뭇거리다가 페르디아 공작에게 물었다.
단호했다. 그것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불변할 진리라는 듯. 하지만 그 말을 온전히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세요. 요즘의 제가 과거의 저와 달라져서 착각하시는 건 아닌지.”
과거의 나였다면 믿었을지도 모르겠다. 한 자락 관심을 받고 싶어서 애쓰던 나였으니까. 더욱이 내게 무심하던 공작이 부쩍 신경 쓰기 시작한 건, 전생을 떠올린 그 시기부터이기도 했으니.
“최근 달라진 네 태도에 놀라긴 했지만 내 생각은 마찬가지다,
엘로디.”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나와 전혀 닮지 않은 얼굴이 보였다. 온통 옅기만 한 나와 달리 짙고 굵은 선을 가진 사람. 내가 페르디아 공작의 사생아인 줄 알고 있을 때, 나는 조금도 닮지 않은 내 모습이 원망스러웠다. 그래서일까. 닮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지금도 공작은 나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믿었다가 또 상처받으면 어떡하지? 이번에 쓰러지면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데. 거듭된 고민 끝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페르디아 공작이 화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친딸도 아닌 주제에 기회 운운하는 게 기분 나쁜 게 당연하니까. 하지만 공작은 그런 기색 없이 나를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당장 독립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대신 제가 페르디아에 남고 싶어지도록 해 주세요.”
그건 떠나려는 나를 붙잡는 공작의 몫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고민하는 듯 턱을 쓸어내린 페르디아 공작이 허탈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껏 수많은 협상을 진행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건이로군…….”
정말 곤란하다는 듯 읊조린 공작이 이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괜히 민망해진 나는 공작의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앞서 말했듯 테미스는 이미 눈치챘을 테고,
얀시와 카를로트는 알지 못해.”
그럴 거라 예상하기는 했다. 카를로트야 워낙 어릴 때부터 나를 ‘사생아’라고 불러 대며 조롱했으니까. 얀시가 나에게 다소 관대한 것도 피가 섞였다는 이유가 있기 때문일 터. 이렇듯 그들이 베푸는 호의에는 우리가 이복 남매라는 이유가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지금까지 숨겨 왔던 것처럼 페르디아 공작은 먼저 그 사실을 밝히지 않겠지.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들의 호의에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는 알아야 할 일이에요.
두 사람을 속이고 싶지 않아요.”
단호하게 뜻을 밝히자 공작은 탐탁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한 직후라서인지 페르디아 공작은 내 말을 다 들어주려 했다. 응석둥이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졌다. 공작이 내 얼굴을 살피며 덧붙였다.
“다만 그 녀석들이 네게 상처를 줄지도 모르는데,
괜찮겠느냐?”
크흠. 공작이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걸까?’
그들의 힐난에 분노를 주체 못 한 내가 주먹질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페르디아 공작에게 용건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정말로 싫어하는 모양인지 성을 입 밖에 내자마자 페르디아 공작이 미간을 좁혔다. 흡사 자동 반사 같은 반응이었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떠올린 건지 공작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무표정한 얼굴을 했다.
그 말에는 페르디아 공작은 아무 대답도 들려 주지 않았다. 대신 다른 화제를 꺼냈다.
어쩐 일인지 공작은 언제나 들고 다녔던 펜던트의 행방을 궁금해했다.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페르디아 공작이 작게 중얼거렸다.
당황한 내가 가리킨 건 존재를 잊고 있었던 다이아몬드 광산 양도 계약서였다.
“그건 이제 가문의 것이 아닌 네 것이니 마음대로 써도 좋다.”
지금껏 내가 쓰는 것마다 페르디아 공작의 앞으로 보고가 올라갔지만, 이 광산에서 나는 수익으로는 뭘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기회를 주겠다고 말해서일까. 아까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광산 계약서에 시선이 갔다.
머쓱하게 중얼거리며 양도 계약서를 흘끔거리는 순간이었다.
아까는 트림하지 않던 탐욕이 이번에는 시원하게 트림을 터트렸다. *** 과거. 아르셀리아가 별채에 머물고 며칠이 지난 후였다. 그의 귀에까지 들어오지는 않았으나 그녀를 둘러싸고 저택 내에서 별별 말이 도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피로했지만 어쩐지 잠들 수가 없어 후원을 산책하던 실베스터는 별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별채 안으로 들어서자 컴컴한 복도 끝 방에서 옅은 불빛이 새어 나왔다.
부나방처럼 불빛을 향해 걸음을 떼려던 실베스터는 미간을 좁히며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뒤돌아가려던 그때였다. 멈칫.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온 흐느끼는 음성에 실베스터의 걸음이 멎었다. 듣는 것만으로 가슴이 울렁거리는 숨죽인 흐느낌이었다.
“엄마를 용서하지 마.
모든 대가는 내가 치를 테니,
너는 꼭 행복해야 해.”
엿들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실베스터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흐느낌이 점점 잦아들었다. 방 안에서 잠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실베스터가 그 자리를 벗어나려 할 때였다.
여린 목소리가 놀란 듯 그를 불렀다. 실베스터는 아르셀리아의 차림새에 주목했다. 폭풍우 쏟아지는 날 저택에 왔던 그때의 옷을 입고 있었다. 본능처럼 예감이 번뜩였다.
작은 가방도 손에 들려 있었다. 잠깐 산책하러 나가려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녀의 말에 실베스터는 조금 전까지도 흐느끼던 울음을 떠올렸다.

아르셀리아는 대답 대신 옅게 웃었다. 실베스터가 사랑했던, 사랑하는 웃음이었다.
무엇이든. 네가 바라는 거라면 다 들어줄 수 있다.
그 속마음을 감춘 채 실베스터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르셀리아가 그에게 다가와 무언가를 건네었다.
“아이의 권능을 봉인해 두었어요.
때가 되면 봉인이 풀릴 거예요.”
아르셀리아는 그가 그녀의 딸을 페르디아로 키우리라 생각한 것을 모른다. 그러니 세베레스의 권능이라는 것을 숨길 이유가 없었다. 이번에도 아르셀리아는 대답 대신 말갛게 웃을 뿐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많은 것을 바랄 자격이 없었다. 이제 정말 떠날 것처럼 실베스터를 지나친 아르셀리아가 머뭇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언젠가 제 아이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변할 거예요.
놀라실까 봐 미리 말씀드려요,
각하.”
사춘기를 말하는 건가. 그때 실베스터는 그녀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다. 시간이 흘렀다. . . . 여름, 엘로디가 1황자에게 파혼서를 보냈다는 이유로 호출한 그 날. 그날따라 엘로디가 뭔가 이상했다.
언제나 낯을 가리듯 눈을 피하던 아이가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말간 연분홍색 눈동자는 그의 첫사랑의 눈과 놀랍도록 똑같았다. 그 순간 실베스터는 깨달았다. 아.
엘로디 페르디아가 변했다. 아르셀리아의 예지대로.
5–7 minutes

페르디아 공작과 이야기를 끝내고, 집무실에서 나와 침실로 향하면서 탐욕과 티격태격 다퉜다.
[아까는 배 안 불렀단 말임!
인간들은 도대체 왜 그럼?
줏대가 없음!]
‘그러는 넌 말투가 왜 그럼?
죄악들은 다 그럼?
바보 같음.’
이 유치한 대화를 속으로 할 수 있다니 정말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종종 마주치는 사용인들에게 어떤 시선을 받았을지 모른다. 침실 앞 복도에 들어선 나는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두 명의 불청객과 맞닥뜨렸다. 얀시와 카를로트였다. 얀시가 상냥한 어조로 물었다.
달라진 내 호칭을 눈치챈 얀시가 방긋 습관 같은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하지만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나는 은근한 물음을 무시했다. 옆에 있던 카를로트가 쭈뼛쭈뼛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질문하면서도 혹시 내 심기를 거스르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모습이 퍽 길 잃은 강아지 같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나를 걱정할 수 있을까? 내 비밀을 알고 나서도 그럴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내가 페르디아가 아니라는 걸 천천히 밝히려던 계획을 수정했다. 나는 침실 문을 열며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카를로트는 무슨 대단한 만찬에라도 초청받은 것처럼 환한 얼굴로 쫄래쫄래 따라 들어왔다. 그 뒤를 따르는 얀시의 표정은 늘 그렇듯 온화하기 짝이 없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사가 다과와 차를 두고 침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카를로트가 득달같이 물었다.
“하지만 난 누님 나가는 거 싫단 말이야.
나가면 지금처럼 자주 보지도 못할 테고…….”
아예 안 볼 생각이었다는 건 조금도 가정하지 않은 듯한 말이었다. 나는 여전히 비 맞은 강아지처럼 나를 쳐다보는 카를로트를 마주 보았다. 처음에는 달라진 녀석의 태도 변화에 적응도 안 되고 놀라기도 했지만,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페르디아에서 가장 싫었던 카를로트였지만, 이제는 제법 동생같이 느껴지고 아주 가끔은 귀엽기도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변했던 것처럼 카를로트는 변했다.
내 새삼스러운 물음에 카를로트가 불안한 듯 손을 꼼지락거리며 대답했다.
“전에도 말했잖아.
처음부터 나는 누님과 잘 지내고 싶었다고.
너무 멍청해서 그걸 몰랐을 뿐이지…….”
그렇다면,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난 이후에도 이렇듯 애정의 눈으로 볼 수 있을까. 줄곧 카를로트를 밀어냈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그사이 익숙해지기라도 했는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내 것이 아닌 걸 내 것인 양 붙잡고 있는 것만큼 부질없는 것은 없었다.
내 질문을 예측도 못 한 건지 카를로트는 물론 얀시까지 동시에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하지만 사실이야.
나한테는 페르디아의 피가 한 방울도 안 섞였어.
그러니까 두 사람과는 남인 거야.”
가족이 아닌 남. 그게 우리의 관계였다.
카를로트는 질 낮은 농담이라도 들은 듯 정색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없이 그냥 침묵했다. 그러자 카를로트가 안절부절못하며 우리 두 사람의 대화를 관전하기만 하던 얀시의 팔을 흔들었다.
이어진 얀시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내가 한 말을 농담 취급하고 대충 대답하는 건가 싶어 얀시를 쳐다보았지만, 그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얀시와 눈이 마주쳤다. 속을 짐작할 수 없는 푸른색 눈동자는 수심을 알 수 없는 먼바다를 닮았다. 과거에는 얀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멋대로 상상하고 추측하며 마음에 들려 애썼다. 유일하게 내게 잘해 주는 대상이니만큼 애정을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바닷속이 궁금하지 않았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뒤에서 무슨 수작을 부리든 상관없다.
‘일을 꾸미는 낌새가 보이면 바로 페르디아 공작한테 말해 버릴 거니까.’
아무리 얀시 페르디아라도 제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을 테니.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얀시를 향해 비굴하게 웃지 않았다.
“없는데 왜 그렇게 쉽게 믿는다고 말하는 거야?
누님이 페르디아가 아니라고 말하는 거라니까?”
답답한 듯 언성을 높이며 카를로트가 얀시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런 생각한 적 한 번도 없는데,
리리 말을 들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
“게다가 리리가 금방 들통날 허술한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잖아.”
얀시의 논리정연한 말에 카를로트는 입술만 달싹거렸다. 사색이 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제법 안쓰럽게도 보였다.
“정 못 믿겠다면 각하께 물어봐.
각하께서도 알고 계신 일이니까.”
“그럼 권능은? 권능은 어떻게 된 건데?
페르디아의 권능이었잖아!”
순진한 카를로트는 파괴 속성의 권능이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때였다. 생각에 잠겨 있던 얀시가 입을 연 건.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얀시가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어차피 이 또한 페르디아 공작에게 물으면 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이니 말해 주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카를로트는 기가 막힌다는 듯 얀시를 쳐다보았다.
“추측한 거야. 예전부터 리리 권능이 이상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으니까.”
“왜! 형만!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데!
난 하나도 안 이상했어!”
얀시의 말마따나 그는 줄곧 내 권능에 대해 의심이 많았다. 독성을 파괴하는 권능이라니, 제법 그럴싸한 변명이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흑막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리리 네 권능이 정화라면,
이상하게 생각되는 부분이 다 설명이 되는구나.”
카를로트가 혼란스러운 듯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세베레스? 세베레스 공작은
19년 전에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그랬,
아…….”
말하다 말고 불현듯 카를로트가 허망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젠장. 하나도 모르겠다고.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누님이 세베레스 핏줄이라니,
말이 돼?”
카를로트가 제 머리를 부여잡으며 웅얼웅얼 중얼거렸다.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신이 들면 바로 사태 파악을 할 것이다.
제법 정 좀 들었다고 익숙해지기라도 했는지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그것도 다시 익숙해지겠지. 허전하겠지만. 진실을 다 밝혔으니 이제 이 대화를 슬슬 마무리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이는 카를로트를 위해 간단히 정리해 주었다.
“애쓰지 않아도 돼,
카를. 남인 나한테 마음에도 없는 누이 대우할 필요는 없어.”
다음은 얀시.
얀시가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진실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평소와 같은 얼굴로 내게 웃어 줄 수 있는 얀시가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라면 이복동생이라 생각했던 존재가 사실 그조차도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이렇게 웃을 수 없을 텐데.
얀시가 내게 품고 있던 감정은 고작 그 정도였다는 뜻이리라. 어차피 모든 패를 까 보인 사이에서, 피차 피곤하게 가족 놀이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순간 얀시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셨다. 이제 속마음을 그대로 내보이겠다는 뜻일까? 그런데 얀시가 어쩐지 말을 뚝뚝 끊으며 물었다.
“내가, 리리 너한테,
친절한 척……하는 걸로 보여?”
동생으로 생각한 적이나 있을까. 그렇기에 충격받은 카를로트와 달리 아무 타격이 없었던 거잖아. 나는 더 이상 얀시의 표정을 관찰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나는 다 식은 찻잔을 빤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페르디아도 아니면서 페르디아라고 떠벌리고 다닐 생각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두 사람한테 거슬리지 않도록 처신할 테니 서로 없는 듯 지내요.
앞으로 가족 식사에도 참석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별채로 돌아가고 싶긴 한데,
그건 아직 허락을 못 받았고…….”
“나가겠다는 저를 붙잡은 건 각하시니까,
정 제가 거슬린다면 각하를 설득하시는 것도 좋겠네요.”
이 정도면 정리가 끝났으리라 생각하고 고개를 든 내가 마주한 것은, 격노로 휩싸인 카를로트의 두 눈이었다.
“뭐가? 누님은 태연하게 그런 말이 나와?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지 마.”
카를로트가 이를 빠드득 갈며 꽉 쥔 주먹을 바르르 떨었다. 테이블이라도 내려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
“마음에도 없는 누이 대우?
누님이 왜 내 마음을 재단해?
아무리 누님이라도 남의 마음을 함부로 말할 권리는 없어.”
“피가 무슨 상관이야?
태어날 때부터 누님은 누님이었는데!
세베레스?
집어치워.
갑자기 튀어나와서는 왜 나대는 거야?
누님은 페르디아라고.
우리는 가족이고,
누가 뭐래도 누님은 내 누님이야!”
얘 왜 이래……?
“하, 감히 세베레스 놈들이 누님을 데려가게 둘 것 같아?”
“저기, 카를로트.
세베레스에서는 아무것도 모르거든?”
금방이라도 세베레스에 쳐들어갈 기세라 얼른 말을 덧붙였지만, 카를로트는 다른 부분에 꽂혔다. 녀석은 마치 뱀파이어가 십자가에 퇴치되듯 파드득 질겁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윽! 카를로트라고 부르지 마!
카를이라고 불러 달라고!
왜 새삼스럽게 거리 두는데?
그런 거 싫단 말이야!”
당연히 차갑게 내쳐야 할 카를로트가 더 떼쟁이가 되어 버렸다.
“피 같은 거 안 섞여도 상관없어.
어쩔 건데?
누님이 내 누님이라는데.
영원히,
죽을 때까지,
아니, 죽고 나서도.”
이윽고 카를로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음습한 말을 내뱉기까지 했다.
급기야 제 이름을 부정하기까지.
이 정도까지 눈이 돌아 버린 카를로트를 제어할 자신이 없어 얀시를 돌아보았지만.
이 인간은 또 왜 이래? 얀시 상태도 정상이 아니었다.
예상과는 다른 난장판에 나는 한숨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단 말이다!

112화. 페르디아답게 붙잡아야지
6–8 minutes

엘로디의 침실에서 나온 후에도 카를로트는 분에 받쳐 씩씩거렸다. 두 사람이 향하는 곳은 페르디아 공작의 집무실이었다.
“형은 왜 가만히 있어? 진짜로 누님이 남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뭐야? 그러고도 형이 첫째야? 이러다 정말로 누님이 세베레스에 가겠다고 하기라도 하면!”
흠칫. 놀란 카를로트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뒷걸음질 쳤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형이 제게 가끔 무서운 면을 보일 때는 있었지만, 늘 웃는 모습이었고 이렇듯 감정적으로 대한 적은 없었으니까. 잠시 후 미간을 찌푸린 얀시가 겁에 질린 카를로트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조금만 더 닥치고 있을래? 네가 짜증 나게 계속 옆에서 종알거리니까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리가 안 돌아가거든.”
누님 일만으로도 벅찬데, 거기에 형까지 이상해졌다. 분명 평소의 얀시 같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말투는 다정한 것 같은데, 막말이 섞여 있는 데다 결정적으로 웃지 않았다. 형의 트레이드 마크는 상냥한 웃음이었는데……! 괜히 들쑤셨다가는 소멸 권능 맛을 볼지도 모른다. 목숨 아까운 줄 아는 카를로트는 잠자코 닥쳤다. 이내 두 사람은 페르디아 공작의 집무실에 다다랐다.
집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두 사람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바라보는 페르디아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공작은 가타부타 말없이 한마디만 내뱉었다.
실낱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던 카를로트는 열없이 중얼거렸다. 정말로 엘로디가 친남매가 아니다. 카를로트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엘로디와 피가 섞이건 말건 누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엘로디의 마음이 문제였다. 이미 페르디아에 마음이 뜨고, 독립하겠다고 말하기까지 하는 마당에 혈연으로도 묶여 있지 않으니 붙들어 둘 수 있는 이유의 가짓수가 줄어드니까. 어느 순간부터 미소 짓지 않는 얀시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리리는 언제부터 자신이 세베레스의 핏줄인 걸 알고 있었나요?”
페르디아 공작의 대답에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시점을 떠올렸다. 엘로디의 태도가 극명하게 변화한 시기가 분명히 존재했다.
“진작 말씀해 주셨다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않았던 아버지의 생각을 존중해요.”
얀시와 카를로트가 차례대로 대답했다. 특히 카를로트는 사실을 숨긴 아버지의 선택에 감사해야 하는 처지였다. 사생아라며 함부로 입을 놀린 과거도 있는 마당에 피가 섞이지 않았다며 조롱하지 않았을 거라는 보장도 없으니까. 과거의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차라리 지금 알게 된 게 다행이었다.
“리리는 이미 우리에게 정을 뗀 것 같은데요. 어떻게 마음을 돌리셨나요?”
“페르디아를 나가겠다는 뜻을 완전히 접은 게 아니라는 뜻이다.”
당연히 페르디아 공작이 엘로디의 마음을 돌렸을 거라 생각했던 두 아들로서는 당혹스러운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묻지 않을 수가 없군. 너희들은 엘로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카를로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페르디아 공작의 눈길이 얀시에게 향했다. 왜일까. 얀시는 그 눈빛이 마치 본질을 꿰뚫는 것처럼 날카롭다고 느꼈다. 대답은 쉬웠다. 그냥 말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입술을 떼는 게 어려운가.
과거, 얀시에게 엘로디란 페르디아 가문에 소속된 이복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속내가 훤히 다 보여서 다루기 쉬운, 피가 반만 섞인 동생, 딱 그 정도. 월식의 밤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그날 밤 폭주 직전의 얀시에게 있었던 일이 그의 생각을 전부 바꿔 놓았다.
엘로디는 거리낌 없이 다가와 토닥여 주었다. 그가 소멸의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칫하면 저가 위험에 처하게 될 텐데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 감정이 엘로디의 쓸모를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권능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을 영원히 감출 수 있는 유용한 존재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평소보다 더 친절을 가장하여 접근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엘로디는 뒷걸음질 쳤다. 가면을 벗은 제 본모습을 일부분 보았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더욱 잘해 주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엘로디는 그가 가까이 다가오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뭐가 잘못된 걸까. 점점 제게 벽을 세우는 것과 달리 카를로트에게 일부분 마음을 여는 엘로디를 볼 때마다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그 애가 이 세상에 나만 존재하는 듯 신앙처럼 믿고 따랐던 때가 있었는데.
친절한 척. 엘로디는 제 상냥함을 그렇게 평가했다. 우습게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친절한 척 웃어 왔으니까. 진심으로 미소 지었던 건 고작 최근 몇 개월이 전부였다. 날 선 모습을 보여도 그를 토닥여 준 엘로디였기에 금세 마음을 열 거라고 쉽게 생각했던 탓도 있었다. 엘로디는 착하니까, 이해해 줄 거야. 잘못 왔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제 손으로 모든 것을 망친 후였다.
분명 호의를 사기 위한 입에 발린 말이었는데,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도 제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소중한 동생, 가족, 그런 말들을 내뱉기 어렵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어째서인지 입술을 달싹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하지만 해야만 했다. 진심을 고백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얀시의 진심이지만, 당사자에게는 닿지 않는 말이었다. 두 아들의 마음이 저와 같다는 걸 확인한 페르디아 공작이 픽 웃었다.
카를로트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공작은 해명하지 않았다.
모두가 똑똑히 목격한 순간이었다. 그들은 건국제 때 균열을 닫고 마수 떼를 몰아낸 기적 같은 힘을 떠올렸다. 엘로디라면 해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얀시가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모호하게 느꼈던 그 사실이 부쩍 현실로 느껴졌다. 페르디아가 아닌 엘로디. 지금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카를로트의 물음에 페르디아 공작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페르디아는 음습하고 끈질기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목적을 이룬다. 정신을 차린 순간 이미 거미줄에 걸려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두 아들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겼다. *** 혼자만의 외출이라니, 대체 얼마 만인가. 페르디아 저택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는 레이안을 발견한 나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당연히 레이안도 나를 반가워할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째서 몸의 당사자인 나보다 레이안이 더 확신하는 걸까. 마차에 올라타 본부로 향하면서도 레이안의 잔소리를 끊이지 않았다.

끝도 없는 잔소리에 나는 결국 되묻고 말았다.
그제야 레이안은 잔소리를 멈추었다. 오랜만에 본부에 도착하자 부단장 마리오가 나를 맞았다.
“이야아. 이게 누구십니까? 세계의 구원자, 엘로디 페르디아 님 아니십니까!”
“말도 마세요. 지금 아가씨, 윌렌티아의 영웅입니다, 영웅. 당장 밖에 나가면 알아본 사람들이 와글와글 몰릴걸요? 다들 아가씨 눈길 한번 받아 보자고 난리일 겁니다?”
내가 윌렌티아의 영웅이라니. 건국제 이후로 대외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감 나지 않았다. 어차피 당장 독립도 물 건너간 마당에 유명 인사가 되어도 상관없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내게는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더 수다를 떨고 싶은지 마리오가 입술을 쭉 내밀고 툴툴거렸다.
레이안의 호명에 마리오는 슬그머니 눈을 피하며 테이블 위로 조사해 온 문서를 올려 두었다.
나는 문서를 펴 찬찬히 훑어보았다. 앞부분은 나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레온 크룬델. 얀시와 비슷한 또래지만 어린 나이에 양친을 잃고 공작 위에 올랐다. 생김새는 어두운 남색의 머리칼, 검은 눈동자를 가졌으며 차분한 성격.
나는 서류를 보는 걸 멈추고 마리오를 쳐다보았다.
“자료는 자세할수록 좋지요. 밑에 보면 쓰리사이즈도 있답니다!”
“참나. 그 정보가 알짜배기인데요. 그거 알려고 의뢰하는 영애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아마 마리오의 말은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4대 가문 중 하나인 크룬델의 주인이고, 미혼인 데다 잘생기기까지 한 남자라니. 그야말로 탐나는 남편감이 아닌가. 자료를 속독하고 있을 때 잠자코 자리를 지키던 마리오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럼 전 다른 일 보고 있을 테니 필요하면 불러 주세요.”
흐흐, 어째서인지 불쾌한 웃음을 남기고 마리오가 집무실을 떠났다. 왠지 기분이 나빴지만 거들떠보지 않고 자료에만 시선을 집중했다. 하지만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적혀 있어 시간이 제법 걸렸다. 그때 레이안이 나를 불렀다.
“크룬델 공작에 대해 파악은 이미 끝냈으니 원하는 바가 있다면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 두꺼운 자료를 다 읽느니 차라리 그게 효율적일 듯싶었다.
될지 안 될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슈타르가 직접 말한 이상 시험해 볼 가치는 충분했다. 그것 말고 떠오르는 방법이 없기도 하고.
“하지만 크룬델 공작은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레이안의 말마따나 크룬델 공작은 웬만하면 저택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4대 가문의 가주로서 참석해야 하는 공식 행사 정도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정도였다. 어떻게 해야 크룬델 공작에게 접근할 수 있을까? 그때 레이안이 읊조리듯 물었다.
“그자와 어떤 식으로 가까워질 생각입니까? 혹, 미인계라도 쓰실 겁니까?”
미인계라니 우습긴 하지만, 어쨌든 웃는 얼굴로 상대방을 속이는 거니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 레이안이 결심한 듯 내게 말했다.
“훔치는 건 저니까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죄책감 느끼실 필요도 없어요.”
정말이지 멋진 논리다. 내가 훔치는 게 아니니까 상관없다는 이상한 논리.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죄악의 봉인석이 도난당하는 것을 크룬델 공작이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4대 가문의 의무가 아니던가.
몰래 훔쳐 와서 들이밀 것 같은 불안한 생각이 들어서 나는 확실하게 못 박았다.
나는 기어코 레이안에게 봉인석을 훔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었다.
“봉인석을 잠깐 빌릴 수 있는 사이가 되려면, 얼마나 가까워져야 할까?”
아직 미련을 버리지 않은 레이안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물었다.
“사람을 풀어 누군가를 수소문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워낙 은밀히 움직인 탓에 우리도 운 좋게 찾은 정보입니다.”
레이안이 운이 좋게 찾았다고 할 정도면 크룬델 공작이 얼마나 조심스럽게 움직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20대 초반의 여성. 추측하건대 죽었다고 알려진 크룬델 공작의 친동생인 듯합니다.”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존재가 있었다. 나 또한 비슷한 또래의 여자를 찾고 있으니까.
하필 에스텔이 떠오르는 건, 단지 우연일까?
113화. 두 사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는데
5–7 minutes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네. 남색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 레온 크룬델 공작과 같은 외양이네요. 이름은 벨리사 크룬델이라 합니다.”
부풀었던 마음이 푸시식 식었다.
에스텔의 외양은 갈색 머리칼에 벽안이었다. 머리카락 색이나 눈동자 색을 바꾸는 마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속하면 부작용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서 하루 이틀 정도 변장할 때만 사용했다. 그러니까 크룬델 공작의 여동생이 에스텔일 수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하긴 일이 그렇게 술술 풀릴 리가 없지.
“죽었다고 알려진 동생을 찾고 있는 거라고 했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네. 저택이 화마에 휩싸였다는군요. 한데 여동생의 시신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크룬델 가문의 영지성이 불타는 사건으로 가주 부부가 사망하여 레온 크룬델이 소년공작으로 등극한 일은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동생에 대한 건은 나도 처음 들었다. 반듯하고 점잖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뒤로는 여동생을 찾아다닐 정도로 가족애가 깊은 사람이었구나. 어쨌든 내게는 꿈의 힘이 간절하게 필요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다부지게 다짐했다.
레이안이 뭐라 말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내 결정에 불만이 있는 듯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접근하실 생각입니까?”
“페르디아 공작께서 얼마나 노력하실지 시험해 보려고.”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 의아하게 쳐다보는 레이안을 향해 방긋 웃어 주었다.

*** 페르디아 공작의 집무실. 서류에 서명하던 실베스터가 고개를 들었다. 그 직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작은 노크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목소리에 실베스터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가 친부가 아니라는 것을 고백한 순간부터, 저를 부르는 엘로디의 호칭은 ‘아버지’에서 ‘각하’로 바뀌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생아 때부터 키웠던 아이라 실베스터에게 아버지라는 호칭은 당연했다. 저 아이는 페르디아로 클 테니, 그가 아버지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랬는데,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고 나니 심기가 비틀렸다. 물론 엘로디에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제게는 그럴 자격이 없으므로.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렸다. 엘로디는 외출하고 돌아와 바로 집무실로 온 건지 외출복 차림이었다. 그는 보고 있던 서류를 덮어 두고 응접용 소파에 엘로디와 마주 앉았다. 따로 부른 적도 없는데 엘로디가 먼저 찾아온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 사실이 좋으면서도, 혹시 이번에도 가문을 나가겠다고 하는 건 아닌지 불안해졌다. 실베스터는 엘로디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황제마저 위에 두지 않는 천하의 페르디아 공작이 누군가의 표정을 살피다니.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하지 말라며 핀잔을 늘어놓았으리라. 어쨌든 엘로디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내는 게 좋을지 고민하던 실베스터는 테이블 위가 휑한 것을 깨달았다.
역시 용건이 있어서 왔군. 당연한 일이었다. 엘로디가 제게 담소나 나누자고 찾아올 일이 일어날 수나 있겠는가. 아버지도 아닌데 보고 싶다고 찾아올 일도 없겠고. 목을 축일 차도 없는데 목이 바싹 탔다. 이내 엘로디가 잠깐 머뭇거리더니 어렵사리 그를 불렀다.
갑자기 웬 크룬델 공작? 의아한 와중에도 실베스터는 착실히 대답했다.
그러자 엘로디의 표정이 만개한 봄꽃처럼 확 밝아졌다.
엘로디가 무엇을 말하든 실베스터 페르디아에게는 들어줄 수 있는 권력과 재력이 있었다. 한데 이어진 엘로디의 말은 영 뜻밖이었다.
엘로디가 방긋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실베스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1황자 아덴미르와 파혼한 게 불과 얼마 전이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남자와의 만남 주선이라니……. 문득 아덴미르와 약혼을 논의하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오늘처럼 엘로디가 먼저 찾아와 그에게 청했다.
쭈뼛대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도 간절하게 두 눈을 빛내던 자그마한 아이. 처음엔 반대했지만 결국 아이의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제 눈치만 보던 엘로디가 처음으로 고집이라는 것을 부렸으니까. 오히려 그때의 자신은 엘로디가 솔직하게 구는 모습이 기꺼웠던 것 같다. 줄곧 중립을 유지하던 페르디아가 1황자의 세력으로 편입되는 것마저 감수할 정도로.
‘레온 크룬델이라. 그자는 목석이라 영 마음에 차지 않는데. 여인을 만난다는 정보는 받지 못했지만 그게 그리 장점은 아니지.’
아덴미르도 성에 차지 않았지만 엘로디가 원했으니 부탁을 들어주었고, 결국 실패했다. 두 번째 약혼마저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좀 더 엘로디를 귀하게 떠받들어 주는 녀석이라면 좋겠는데. 누가 좋을까, 잠깐 고민했지만 최소한 윌렌티아 내에는 마음에 차는 놈이 없었다. 외국을 뒤져 봐야 하는 것인가. 우선은 시간을 벌 작정으로 실베스터가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하지만 엘로디의 뜻은 완고했다.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실베스터는 내심 당혹스러웠다. 공식 행사에만 모습을 드러낼 뿐 다른 활동은 전혀 하지 않는 레온 크룬델이건만 도대체 언제 호감이 생긴 건지. 요즘 애들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엘로디 페르디아가 못 가질 것은 없다. 설령 가지고 싶은 게 사람이라 해도. 엘로디는 제 딸이니까. 페르디아에 속한 이상 바라는 것을 모두 손에 쥐어야 마땅했다. 그는 힐끔 자신을 바라보는 엘로디를 마주 보며 흔쾌히 대답했다.
해사하게 웃던 엘로디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속으로 제 욕을 하는 게 뻔히 들여다보여서 맹랑하고 귀여웠다.
“또한 주말 점심 식사 후 나와 함께 티타임을 가질 것.”
실베스터로서는 다소 충동적으로 내놓은 조건이었다. 엘로디가 저를 ‘각하’라고 부르는 게 줄곧 마음에 들지 않았고, 한 달에 한 번 갖는 가족 식사 이외에 얼굴 볼 기회가 없다는 것도 평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엘로디는 제게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그는 그 기회를 붙잡아야만 했다. 아버지로서. 조건에 대해 골몰히 생각하던 엘로디가 관찰하듯 그를 보며 물었다.
그거면 되냐니. 실베스터는 저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한 것이 무색하게 엘로디는 그의 조건을 가볍게 받아들였다.
“그래. 내게는 천금 같은 기회지 않느냐. 엘로디 네게 점수를 딸 수 있는.”
그답지 않게 솔직하게 말하자 엘로디의 두 눈이 커지더니 이내 뺨이 붉어졌다. 그녀는 부끄러움에 흠칫 시선을 피했다.
“제 부탁은 한 가지인데 각하의 조건은 두 가지인 게 불공평해요.”
엘로디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실베스터가 서둘러 덧붙였다.
“아, 별채로 돌아가겠다는 것도 제외하는 게 좋겠군.”
어려운 부탁인 건지 잠깐 망설이던 엘로디가 머뭇거리며 입술을 떼었다.
“주제넘은 참견이라는 건 알지만, 공작 부인께 사과하시는 게 좋겠어요.”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으시고 저를 데려오셨잖아요. 지금이라도 용서를 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페르디아 공작이 제 아내인 테미스에게 어느 날 데려온 아이의 출생을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때부터 줄곧 엘로디의 마음은 불편했다. 제 출생을 짐작했건 아니건 공작은 공작 부인에게 모든 것을 설명했어야 했다.
어쨌든 자신의 존재로 인해 페르디아 공작과 부인은 사실도 아닌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도 않은 아이가 사생아가 되고, 공작 부인은 그런 아이를 떠맡게 된 멍청하고 불쌍한 아내라며 사교계에 불미스러운 소문이 돌지 않았나.
“지금이라도 부인과 제대로 대화하시는 것, 그게 제 조건이에요.”
스스로 주제 넘는다고 생각했다. 진짜 딸도 아니면서 이런 조건을 다는 게 얼마나 우스운지도 알았다. 하지만 엘로디는 희망을 품고 실베스터를 힐끔 보았다.
기대 어린 시선을 마주한 실베스터는 치부가 드러난 기분에 사로잡혔다. 하다 하다 그런 것까지 걱정하게 만들다니.
그와 테미스와의 결혼 조건을 모르는 엘로디가 그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을 거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실베스터는 목이 졸리는 듯한 심정으로 힘겹게 대답했다.
바로 승낙할 줄은 몰랐기에 엘로디는 조금 놀랐다.
페르디아 공작은 알기나 할까. 그가 크룬델 공작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게 그토록 싫어하는 세베레스 공작을 깨우기 위한 것이라는 걸. 하지만 엘로디는 끝까지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엘로디 나름대로 소심한 복수였다. *** 집무실 밖. 문에 달라붙어 귀를 딱 붙인 채 엿듣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이름하여 카를로트 페르디아. 페르디아 공작이 제 존재를 묵인해 준 것도 모르는 막내아들은 방금 들은 소식을 누군가에게 말해야 한다는 생각에 어딘가로 서둘러 달려갔다. 목적지는 얀시의 집무실이었다.
노크도 없이 난입한 카를로트의 호들갑에 서신을 쓰고 있던 얀시가 고개를 들었다.
“놀라지 마. 리리 누님이 크룬델 공작이랑 맞선을 본대!”
얀시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놀라기보단 황당함이 컸다.
레온 크룬델. 4대 가문 크룬델의 가주이며 잘생긴 외모와 반듯한 품행으로 사교계 뭇 영애들의 관심 대상이었다. 황족을 제외하고 결혼 적령기의 남성 중에서 가장 높은 신분을 지닌 자이니만큼 공작 부인 자리를 노리는 이들은 수없이 많았다. 게다가 그는 얀시 또래니만큼 엘로디와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도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의아해졌다.
두 사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는데.

114화. 얀시는 엘로디가 무서웠다
6–7 minutes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얀시는 1황자와 파혼하고 2황자의 구애를 거절한 후 결국 엘로디가 선택한 것이 용병 이안이라 생각했다. 조사했을 때, 그렇게 오래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닌데도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사뭇 달랐다. 마치 오랜 연인을 보는 듯했으니까. 그건 하루 이틀로 흉내 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얀시의 예측이 보란 듯이 빗나갔다. 역시나 대상은 엘로디 페르디아. 언제나 변수의 원인이었다.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서신을 마무리하는 것은 글렀다. 얀시는 깃펜을 내려놓으며 카를로트에게 물었다.
“아니, 누님이 크룬델 공작이랑 만나게 해 달라고 졸랐어. 자연스럽게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그나저나 크룬델 공작이 우리 리리 누님한테 흑심이라도 품으면 어떡하지? 형도 알잖아. 우리 누님이 얼마나 천사 같은지! 물론 가끔 무섭긴 하지만…….”
잔뜩 흥분한 카를로트가 주절주절 쉴 새 없이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맘 같아선 끼어들어서 방해 공작을 펼치고 싶지만 엘로디에게 미움받을까 봐 그러지 못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얀시의 생각도 카를로트와 같았다. 괜히 나섰다가 그렇지 않아도 남이라 선 그은 상황에서 미운털이라도 더 박히면 곤란했다.
“그럴 거였으면 진작 구혼서를 넣었겠지, 카를. 같은 4대 가문이니만큼 멀리서 엘로디를 볼 기회가 많았으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누님이 1황자랑 약혼한 사이였으니까 연심을 숨겨 왔을 수도 있지. 형은 그것도 몰라?”
얀시가 한껏 이죽거리는 동생을 빤히 바라보자 카를로트가 흠칫하더니 딴청을 피우며 시선을 피했다. 이번에도 얀시는 웃지 않았다.
얀시는 평소처럼 생긋 웃다가도 갑자기 냉담한 얼굴을 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쩐지 낯설지만은 않았다. 언젠가 이런 사람을 마주한 적 있는 것 같은데. 카를로트는 언제 이런 느낌을 받았는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은 마치…….
페르디아 공작과 판박이처럼 닮아 있었다. 늘 웃고 있어서 몰랐지만 무정한 얼굴의 얀시는 아버지와 놀랍도록 닮았다. 젊었을 적 실베스터 페르디아가 딱 저런 모습이겠거니 싶을 정도로.
‘리리 누님이 사실 친누이가 아니라는 걸 안 이후로 저렇게 변했지?’
낯선 건 맞지만 웃든 말든 얀시 페르디아가 제 형인 건 변함이 없다. 저와 만나기만 하면 싸우던 엘로디를 누이로서 애정하게 되었듯 얀시 페르디아 또한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지 않은가.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카를로트의 마음이 편해졌다. 그는 얀시의 옆에 슥 다가가 은근하게 물었다.
“누님이 크룬델 공작이랑 결혼하겠다고 하면 어쩌려고? 어쩌면 아버지가 독립 반대하니까 결혼해서 이 저택을 나가려는 건지도 몰라. 계약 결혼이라도 제시할 생각일까?”
페르디아 둘째 공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계약 결혼’이라는 단어에 얀시는 그만 감탄하고 말았다.
은밀한 취미를 들켜서인지 카를로트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고도 찔리는 게 있는지 주먹을 불끈 쥐고 버럭버럭 외쳤다.
“진짜야. 마사라는 누님 하녀가 누님이 좋아하는 책이라고 몰래 알려 줘서! 그래서 읽은 것뿐이란 말이야! 내가 그딴 책 읽고 싶어서 읽은 줄 알아?”
얼마나 억울한지 카를로트의 눈 밑이 붉게 물들기까지 했다. 얀시가 짓궂게 웃으며 카를로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렇다기엔 리리가 읽은 적 없는 책도 서가에서 가져갔던데? 제법 취향에 맞았나 보구나, 카를.”
“그, 그건…… 그냥 참고 차 다른 소설은 어떤가 하고, 아니, 잠깐만. 형은 그걸 또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아냐니.
좋아하는 음식과 디저트, 음악, 소설가나 시인, 보석의 종류, 꽃, 계절, 드레스의 종류, 하물며 선호하는 남자의 외모까지. 얀시는 엘로디의 선호를 그가 가장 잘 파악하고 있다고 자신했다. 그래서 더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레온 크룬델이라는 남자는 엘로디의 취향과 거리가 멀었으니까. 결벽적인 신사 쪽은 엘로디 취향이 아니었다. 외모로만 따지자면 전형적인 왕자님 스타일, 그러니까 진짜 황족인 아덴미르 1황자가 취향에 가장 부합했다. 용병 이안 같은 유형도 좋아하긴 하지. 그런데 접점도 없는 레온 크룬델은 왜 갑자기 등장했을까? 크룬델 가문에 대해 얀시는 개인적인 유감이 없었다. 4대 가문이고, 중립을 지키니 황가의 후계자 다툼에 휘말릴 일도 없는 데다 사람 자체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걸까? 엘로디의 취향에 대해 다소 깊게 떠올리던 얀시가 습관처럼 미소를 지으며 카를을 바라보았다.
“왜? 누님이 저택 나가려고 크룬델 공작을 이용할지도 모른다는 나의 논리적인 가설이 어째서 틀렸는데?”
제 의견이 부정당해 기분이 상한 카를로트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얀시는 턱을 괴며 눈치 없는 막냇동생을 응시했다.
“리리는 언제든 이 저택을 나갈 수 있어. 설령 아버지가 반대하더라도. 이미 주도권을 잡은 건 리리거든.”
그 말이 카를로트에게는 제법 어렵게 다가왔다.
“우리는 그저 처분을 기다리는 처지야, 카를. 리리가 우리에게 한 줌 자비를 베풀어 주기를 바랄 수밖에.”
비로소 얀시의 말을 이해한 카를로트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실은 자신 없어, 형. 옛날에 리리 누님한테 내가 했던 짓을 생각하면…… 나를 싫어하는 게 당연하잖아. 내가 노력한다고 해도 누님이 나를 좋아해 줄까?”
얀시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카를로트가 얀시를 쳐다보며 말을 덧붙였다.
아직 남들 눈에 그렇게 보인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건가. 그러나 다 의미 없는 일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엘로디는 이미 얀시를 제 오라버니라 여기지 않았으니까. 지금의 엘로디는 조금 잘해 주면 금세 웃어 주던 순진한 꼬마가 아니었다. 그래서 막막했다. 엘로디를 대하는 제 친절을 모두 거짓이고 가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지금 와 다정하게 대해 준들 모두 가식이라 생각할 테니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제 엘로디를 향한 모든 태도가 진심인데, 알아주지 않겠지. 웃음이라는 가면으로 속마음을 숨기는 건 얀시의 생존 수단과도 같았다. 이제는 그러지 않는 게 힘들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엘로디의 그 말을 들은 이후로는 습관대로 미소를 짓다가도 흠칫 놀랐다. 지금 내 미소는 가식인가? 진심으로 웃는 거라 생각했는데, 아닌가? 더럭 겁이 났다. 생의 이정표가 부러진 기분이었다.
얀시는 엘로디가 무서웠다. *** 페르디아 공작은 크룬델 공작과 만날 일이 생기면 부르겠다고 했지만 하루가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그동안 내가 외출도 하지 않고 침실에만 박혀 있으니 좀이 쑤신 건지 탐욕이 슬쩍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맞음. 정원에 갈 거임. 그리고 밤이 더 운치 있고 좋음.]
“너 정원에 나간다고 하면서 사실 몰래 이르칼라 따까리 짓 하고 다니는 거 아니야?”
[그런 오해는 사양임! 날 어떤 죄악으로 보는 거임?]
[아님! 그냥 저택 한 바퀴 돌면서 맛있는 거 얻어먹는 것밖에 안 했음!]
정말 억울한지 탐욕이 펄쩍 뛰었다. 나는 새삼 배신감을 느꼈다.
‘내가 느끼는 탐욕이면 충분하다더니, 잘도 먹고 다녔네, 이 돼지 자식.’
자기가 살찐 이유가 내가 탐욕스럽기 때문이라면서 온갖 매도란 매도는 다 했으면서!
탐욕이 촉촉한 황금색 눈을 반짝거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무시무시한 죄악이라기엔 너무도 깜찍한 모습이었다. 잠깐 고민하는 척하던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같이 나가자. 마침 나도 산책이나 다녀올까 했으니까.”
탐욕은 당연하다는 듯 폴짝 뛰어올라 내 품에 안겼다. 탐욕 전용 운송 수단이 된 기분이라 그렇게 유쾌하지 않았다. 두꺼운 숄을 걸치긴 했지만 밤바람은 매서웠다. 그래도 흐리멍덩하던 정신이 확 깨는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별채라. 본저택에서 지낸 이후로 별채에 들른 적이 없었다. 사람은 적응이 빠른 만큼 망각도 쉽다. 어느샌가 별채에서 생활했던 기억이 흐릿해지고 있었으니까. 일평생을 살아온 곳인데도 말이다. 탐욕의 말대로 별채로 걸음을 옮겼다. 어둠 속의 건물을 올려다본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정말로 별채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밤이라 인부들이 없는 공사 현장이 제법 을씨년스러웠다. 오래된 건물이니만큼 곳곳에 노후화된 부분이 많았는데 그곳들을 싹 뜯어고치는 모양이었다. 실내는 어디를 수리하는지 궁금해서 별채 안으로 발을 들였다. 불빛도 없는 어두컴컴한 복도에 내 발소리만 요란하게 울렸다.
대충 구경을 끝낸 내가 도착한 곳은 별채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꼭대기 층에 올라 내가 제일 시간을 오랫동안 보냈던 퇴창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창밖으로 본저택의 모습이 일부분 보였다. 충동적으로 창을 열자 세찬 바람이 몰아쳐 내 머리칼을 사정없이 휘저었다.

결국 탐욕의 원성에 못 이겨 창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웅크려 앉아 있었을까. 창밖에서 아주 가는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탐욕이 잔뜩 흥분해서는 벌떡 일어났다.
내 무릎에서 뛰어내려 와다다 달려 나가던 탐욕이 갑자기 내게 되돌아왔다. 슬금슬금 내게 다가오는 탐욕 너머로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건네는 인사에 나 또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얀시의 흑암한 머리에 물기가 반짝거렸다. 맞고 온 눈이 녹은 듯했다. 이 밤에 왜 별채에 있는지, 혹은 왜 별채에 왔는지 물을 법도 하건만 우리 중 누구도 묻지 않았다. 대신 얀시는 다른 질문을 했다.
나는 무릎 위로 올라온 탐욕을 품에 안으며 대답했다.
대화가 끊겼다. 과거의 나였다면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 가기 위한 노력을 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얀시가 들고 있는 유리병이었다. 그 시선을 눈치챈 얀시가 내게 그 병을 내밀었다.
체리 절임. 나는 그 병을 받지 않고 빤히 바라보았다. 익숙한 병이었다. 어릴 때 종종 얀시가 내게 선물해 주었던 달콤한 간식이었으니까. 이걸 보니 나를 동생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바보 같은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응. 얀시 오라버니가 선물로 준 거잖아. 아껴 먹을 거야!”
다정한 오라버니를 또 만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씩 꺼내 먹었던 몽글몽글한 기억. 나는 체리 절임 병을 보며 쓰게 웃었다.
“네가 좋아하는 거라 가져온 건데, 마음에 들지 않아?”
툭, 병을 들고 있는 얀시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115화. 너만이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해
6–7 minutes
내 대답이 충격적이기라도 했던 건지 얀시의 눈에 초점이 흐려졌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다정한 오라버니 흉내를 낼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똑똑한 얀시라면 알아들었을 것이다. 내 말이 과거형이라는 걸. 외로웠던 별채의 소녀에게는 체리 절임이 필요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었다. 밤이 늦었다. 눈발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행여 눈보라라도 몰아치기 전에 침실에 돌아가야 했다. 탐욕을 고쳐 안은 나는 우두커니 서 있는 얀시를 지나쳤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못 들은 척 계속 걸음을 옮기던 그때였다.
떨리는 듯한 그 음성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얀시와 물기 젖은 목소리라니, 너무 안 어울렸으니까. 놀라 고개를 돌리자 아까 그 자리에 그대로 선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얀시가 보였다.
복도가 어두워서 얀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상대는 얀시 페르디아였다. 내게 신뢰를 얻기를 바라는 저 모습조차 꾸며 낸 게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얀시의 웃는 모습에 놀아나는 건 더 이상 사양이었다.
냉소적인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얀시가 갈급하게 답했다.
일순 달무리가 걷히며 얀시의 표정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정말 믿을 수 없게도 얀시는 울고 있었다. 놀란 나머지 사고가 멈추었다. 얀시가 울다니. 분명 연기일 텐데, 연기여야 하는데, 마음이 세차게 요동쳤다. 눈물을 닦지도 않고 얀시가 서글프게 웃으며 자조적으로 읊조렸다.
“리리, 네 말이 맞아. 과거의 난 너를 동생으로 생각하지 않았어. 애초에 나라는 인간은 글러 먹어서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한 적도 없었으니까. 너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었지…….”
하. 얀시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렇지만 최근 너를 대할 때 거짓으로 웃은 적은 없어. 나는 널,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이렇게 말해도 여전히 너는 믿지 못하겠지?”
나는 얀시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얀시의 고해가 이어졌다.
“얼마 전 카를이 내가 부럽다고 하던데, 나는 오히려 카를이 부럽거든. 리리 넌 카를의 애정은 의심하지 않잖아, 그렇지?”
한순간에 변한 태도에 적응하는 게 힘들긴 했지만 얀시의 말대로 카를로트의 진심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단순하고 멍청해서 누군가를 속일 수 있는 녀석이 아니었으니까.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네가 나를 믿어 줄지.”
얀시가 고개를 푹 숙이며 한 손에 제 얼굴을 묻었다. 속절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불편했다. 얀시 페르디아는 흑막이다, 라는 전제에 사로잡혀 편협하게만 생각했던 걸까.
‘원작’이라는 기억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얀시를 계속 밀어내는 건 못 할 짓이겠지. 페르디아 공작에게 기회를 주었고, 내게 애정을 표하는 카를로트를 내심 받아들인 것처럼 얀시에게도 공평하게 기회를 줘야 할까. 잠깐 망설이던 나는 여전히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얀시를 바라보았다.
잠깐 망설이던 나는 그에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다.
“그럼 오라버니가 숨기고 있는 것도 모두 말해 줄 수 있겠네요.”
기대도 없는 물음이었다. 그 누가 숨기고 있는 걸 술술 불 수 있을까. 당장 나만 해도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것들이 수두룩하지 않나. 그런데 얀시는 내 예상을 보란 듯 깨트렸다.
“너와 관련된 거라면…… 네가 리리 아르셀이라는 투자자로 활동하고 있는 걸 알고 있어.”
그건 무려 내 뒷조사를 했다는 시인이었다. 추측만 하는 것과 당사자에게 직접 듣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놀라움을 추스를 새도 없이 얀시는 거리낌 없이 제 비밀을 말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비밀만큼은 얀시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권능의 제어는 얀시의 가장 약한 부분이자 역린이었다.
“조금만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제어하지 못하고 손에 닿은 걸 다 소멸시켜. 이건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야. 이제는 리리와 나의 비밀이 되었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약점을 밝힌 건데도 얀시의 표정은 홀가분해 보였으니까.
바로 이해되지 않는 말에 나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러자 얀시가 한 발짝 다가왔다. 흠칫 뒤로 물러나자 얀시의 눈이 오히려 휘둥그레졌다. 내 반응에 도리어 그가 놀란 듯했다.
“미안해, 리리. 놀라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 다가가지 않을게. 무서워하지 마.”
오히려 나를 진정시키려는 얀시가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 같았다.
“내가 한 말의 뜻은, 권능을 제어하기 힘들 때 너와 닿으면 제정신이 든다는 의미였어. 기억나니? 지난 월식의 밤에 폭주 직전이었을 때 네가 등을 두드려 줬잖아. 그때 처음 알게 되었어.”
그냥 에스텔이 했던 걸 시늉했을 뿐인데, 나와 접촉하면 권능을 제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건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리리 너의 권능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구나. 네 권능 속성이 세베레스의 정화니까.”
잠자코 얀시의 말을 듣고 있으니 한가지 의구심이 떠올랐다.
“오라버니의 폭주를 막아 줄 수단으로 제가 필요한 게 아닐까요?”
얀시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게 웃는 모습은 또 낯설었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사람이구나. 너무 많은 걸 들어 버린 탓에 혼란스러운 내 표정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얀시가 심장을 쥐어뜯듯 가슴께를 꾹 눌렀다.
“머리든 심장이든 죄 갈라 내 마음을 증명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텐데.”
무슨 그런 무시무시한 소리를.
그러자 얀시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사실 완벽히 신뢰하기에는 얀시의 평소 성격이 장벽이었다. 고작 5할이라는데도 얀시는 기뻐 보였다.
괜히 가슴이 울렁거려서 나는 홱 몸을 돌렸다.

*** 며칠 후, 드디어 페르디아 공작이 나를 호출했다. 그 연락만을 기다리고 있던 나는 얼른 집무실로 향했다.
“크룬델 공작과 사업 건으로 만날 일이 생겼다. 동행할 테냐?”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내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자 페르디아 공작이 흡족한 듯 미소 지었다.
“또한 주말 점심 식사 후 나와 함께 티타임을 가질 것.”
그래, 그 약속. 크룬델 공작과 만남을 주선하는 대신 호칭을 정정하고 주말에 티타임을 가지기로 했었다. 늘 아버지라고 불렀던 존재를 다시 아버지라고 부르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쉽게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지. 일부러 새침하게 대답했지만, 페르디아 공작은 기분 나쁜 기색도 없이 즐겁다는 듯 웃었다. 한 방 먹었다는 듯.
유쾌하게 웃는 모습이 신기해서 멀거니 쳐다보자 공작이 내 앞에 마디 굵은 손을 내밀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올리자 공작이 내 손을 힘주어 쥐었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 페르디아에서 가장 화려한 마차에 올라 크룬델 수도 저택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페르디아 공작은 나에게 오늘 방문 이유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페르디아 상단은 황실에 군수 물자를 납품하지만, 일부는 다른 가문에 판매하기도 한다. 오늘 크룬델 공작을 만나러 가는 건 그 건에 관해서란다.”
군수 사업에 대해 잘 모르지만, 가문 간 중요한 거래라고 알고 있었다.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졌다.
“엘로디 네가 염려할 건 아무것도 없다. 따라오기 귀찮다는 딸이 귀여워서 굳이 데리고 왔다고 하면 되지 않으냐. 기껏해야 실베스터 페르디아가 딸등신이라는 소문이 좀 퍼지겠지.”
천하의 페르디아 공작이 딸등신이라니요. 소리 없이 경악하자 공작이 픽 웃으며 덧붙였다.
낯간지러운 말에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때, 운 좋게도 마차가 멈춰 섰다. 나는 페르디아 공작이 내리기도 전에 마차 문을 열고 얼른 뛰어내렸다. 그 순간 저택 정문에서 마중 나와 있던 크룬델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에스코트도 받지 않고 냅다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영애라니, 철부지라고 생각할 게 뻔했다. 하지만 어른스러운 크룬델 공작은 내 추태를 못 본 척하며 뒤이어 내리는 페르디아 공작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가볍게 인사를 끝마치자 크룬델 공작이 내게 시선을 옮겼다.
“상단 교육 관련으로 함께 방문한다는 서신을 받았습니다. 레온 크룬델입니다, 공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어서 통성명이 인사의 시작이었다.
“엘로디 페르디아입니다. 인사를 드리는 건 처음이네요, 각하.”
정말이지 반듯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목 끝까지 채운 단추라든가, 꼿꼿한 자세라든가, 그야말로 금욕적인 인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 탐욕이 불쑥 말했다.
도덕 교과서 그 자체를 사람으로 만들면 크룬델 공작이 탄생할 것이다. 그런데 도덕 교과서 그 자체인 크룬델 공작이 죄악과 계약을 했다고? 도무지 믿기 힘든 말이었다. 하지만 탐욕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으니 아마 진실일 텐데.
‘내가 너랑 계약……은 아니고 아무튼 같이 있는 걸 저 인간도 알아채는 거 아니야?’
[괜찮음. 너랑 나랑은 계약한 게 아니라 모를 거임.]
추측하는 말투라는 게 다소 불안하긴 하지만 딱히 해결 방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탐욕의 말을 믿을 수밖에.
‘지금까지 크룬델 공작 봤을 때는 아무 말 없다가 지금 알려 주는 이유는 뭐야? 죽을래?’
[지금까지는 저 남자랑 가까이 있었던 적이 없었잖음! 가까이 있어야 기운을 느낄 수 있단 말임!]
제 딴에 억울했는지 탐욕이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려 계약이 성사된 죄악의 봉인석을 훔친다? 그야말로 파국이었다.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원래는 접점을 많이 만들어서 가까워지는 방법을 쓰려고 했지만, 그보다 더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생겼다.
나는 기회를 엿보며 사업 이야기를 하는 두 공작 사이에 끼어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이런. 잠깐 보좌와 통신하고 와야겠군. 엘로디, 아버지 금방 다녀오마.”
웬일로 페르디아 공작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 물론 우연이겠지만 내게는 좋은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크룬델 공작과 단둘만 있어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야 했기에 제법 골머리를 앓고 있었으니까. 언제 페르디아 공작이 돌아올지 모르니 짧고 굵게 끝내야 했다. 차를 마시던 크룬델 공작을 불렀다.
잠시 후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크룬델 공작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는 왕년에 사람 신경을 살살 긁고 다녔던 기억을 되살리며 생긋 웃었다.
“죄악을 감시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 4대 가문의 가주가 죄악과 계약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과연 어떨까요?”
레온 크룬델의 무결한 얼굴에 금이 갔다.
116화. 실베스터 페르디아의 계획
6–7 minutes

뒤늦게 무너진 표정을 수습해 봤자 소용없었다. 나는 이미 똑똑히 보았으니까. 크룬델 공작이 크게 당황한 것을.
‘내가 그런 질문을 하리라고 예상도 못 했던 거겠지.’
관심을 끄는 건 성공했으니, 이제 대화의 주도권을 잡을 차례였다. 당연히 크룬델 공작은 모르쇠로 나왔다.
거짓말 같은 건 결코 못 할 도덕적인 남자라더니, 다 헛소리였네! 탐욕이 나에게 귀띔해 주지 않았더라면 깜빡 속아 넘어갔을 정도로 태연한 얼굴이었다. 나는 페르디아 공작이 사라진 곳을 슬쩍 보았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마음이 급해졌다. 빠르게 끝내야 한다. 그 내용 중에 내 이미지 관리는 없었다.
정말이지 내 입으로 담기에 부끄러운 말이었다. 수치스러운 나와 달리 크룬델 공작은 담담하게 답했다.
“예. 공녀가 신 이슈타르께서 선택하신 구원자라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직접 보았으니까요.”
“잘 알고 계시네요. 음. 그렇다면, 제가 각하께서 죄악과 계약했다는 사실을 알아보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아시겠죠.”
나는 크룬델 공작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더 이상 모른 척 발뺌해도 소용없다는 의지를 담아서. 결국 먼저 눈을 피한 건 크룬델 공작이었다.
뭐가 좋다는 거지?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한숨을 내쉬며 포기한 듯 입을 열었다.
잠깐, 이게 아닌데……!
“죄악을 봉인한 가문의 후예로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구원자께서 진실의 눈으로 제 과오를 보셨으니 더는 숨길 수 없겠지요. 거짓을 고하여 죄송합니다, 공녀.”
이렇게 회개하며 나 잡아가라는 식으로 나오는 건 내 예상에 없었다.
차라리 계속 모르는 체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어떡해야 할지 고민하던 나는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리는 공작을 빤히 보았다.
지금 모습이 크룬델 공작의 본심인 모양이었다.
‘내심 죄악과 계약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거로구나.’
그러는 나도 죄악과 계약까지는 아니라도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어쨌든 크룬델 공작을 신전에 고발할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다.
“하지만 각하, 저만 입 다물면 아무도 각하께서 죄악과 거래했다는 사실을 모를 거예요.”
크룬델 공작이 잔뜩 경계하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럴 만도 했다. 갑자기 약점을 잡고 뒤흔들더니 이제는 거래를 제안한다고 말하다니.
‘하지만 천천히 회유하기엔 언제 페르디아 공작이 올지 모른단 말이야.’
차라리 지금처럼 강한 인상을 남기는 편이 더 나았다. 나는 신중한 표정을 지으며 곤란하다는 듯 답했다.
“거래 내용을 지금 말씀드릴 수는 없어요. 하겠다고 답하시면 그때 말씀드릴게요. 저와 거래하실 거예요?”
“각하의 비밀이 엄중하듯 제 비밀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니 신뢰할 수 없는 상대에게는 아무 말씀도 드릴 수가 없어요.”
나는 내 통신 마도구의 코드가 적힌 쪽지를 크룬델 공작 앞으로 밀었다.
“고민할 시간을 드릴게요. 일주일. 그 이상은 안 돼요.”
제안의 형태긴 했지만, 사실은 반협박이었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다 털어놓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죄악의 힘을 빌려 세베레스 공작과 접촉하는 일인 만큼 발설에 신중해야 했으니까. 내가 세베레스 공작의 친딸이라는 것도 알려지지 않는 편이 좋을 테고.
결벽 있는 성격으로 가능성이 아예 없는 가정은 아니었다. 나는 슬쩍 단서 하나를 흘렸다.
“어쩌면 제가 각하께서 찾고 계시는 분을 수색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거래니까요.”
크룬델 공작의 눈이 살짝 커졌다. 묻고 싶은 게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나온 말은 그저 승낙의 말이었다.
“참, 아버지께서는 아무것도 모르시니 우리끼리의 비밀로 해요.”
크룬델 공작이 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페르디아 공작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닙니다, 페르디아 공. 공녀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손님과 집주인이 담소를 나누었다는데 페르디아 공작의 표정이 왜 어두워지는 거지? 어쨌든 크룬델 공작과 접점을 만든다는 방문 목적을 달성했으니 한숨 돌렸다. 나는 혹시나 써먹을 정보가 없는지 귀를 쫑긋 세우며 그들의 사업 이야기를 경청……하려고 했지만, 정신이 점점 흐려졌다.
내 속도 모르는 탐욕은 이미 코를 골며 질펀하게 자는 중이었다. 어렵기만 한 이야기투성이라 졸음이 몰려들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남의 집에서 잠드는 추태를 부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누가 들어도 마무리 인사인 말에 내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페르디아 공작을 따라 벌떡 일어났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페르디아 공. 그리고 ……공녀.”
“크룬델 공작 각하의 배려로 유익한 배움이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에 뵈어요.”
어차피 통신 마도구의 코드도 넘겼으니 당장은 당사자에게 볼일이 없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는 페르디아 공작을 얼른 따라 나갔다.
우리는 곧바로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장장 몇 시간을 앉아 있었더니 좀이 쑤셨다. 굳어 버린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을 때 페르디아 공작이 나를 응시했다.
“크룬델 공작과는 용건이 끝났느냐? 네가 원한다면 더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러자 페르디아 공작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뭐가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거지? 뜻 모를 말에 의아했지만 그렇게 궁금하지 않아 되묻지는 않았다.
볼일도 마쳤으니 당연히 페르디아 저택으로 돌아갈 거냐는 물음이었지만, 공작은 대답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페르디아 공작이 그답지 않게 은근하게 물었다. 나는 당연히 뭘 말하는지 알아들었다.
내 예상이 정답이었는지 ‘아버지’라고 부르자마자 공작의 입매가 느슨해졌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보였다. 너그러울 때 표정이 약간 누그러지는 부분이라든가. 노력하겠다는 그 말이 마냥 빈말은 아닌 것 같았다. 괜히 민망해진 나는 마차 커튼을 살짝 걷어 바깥을 구경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바깥 풍경이 역주행하고 있었다.
휴, 하고 한숨을 내쉰 페르디아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도 당당한 선언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냥 외출 겸 갈 곳이 있다고 하면 될 걸, 잘 맞춰 주시네…….’
*** 페르디아 부녀가 페르디아 저택을 나섰을 때부터 그들의 뒤를 은밀히 밟는 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실베스터는 그치들을 내버려 두었다. 그들의 정체는 특종에 눈이 먼 기자들이었다. 뭐라도 기삿거리를 찾으려고 굶주린 하이에나 떼처럼 몰려오는 놈들. 평소라면 손쉽게 그들을 따돌렸겠지만 오늘 실베스터는 그러지 않았다. 이유는 단 하나. 엘로디와의 돈독한 부녀 관계를 과시하기 위하여. 많이 목격하고, 많이 써서, 부디 제국 전역에 퍼트리길. 최근 페르디아 공작이 엘로디 페르디아를 귀애한다는 기사가 몇 번 나긴 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이것은 행여라도 정말 리하르트 세베레스가 깨어나더라도, 엘로디가 제 딸임을 주장할 수 있도록 밑밥을 까는 작업이었다.
실베스터는 여전히 목적지가 궁금한지 창밖을 기웃거리는 엘로디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난데없이 크룬델 공작과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주선해 달라는 요청에 얼마나 놀랐던가. 이번에는 크룬델 공작과 결혼하겠다고 하지는 않을지 내심 걱정했다. 만약 그렇다면 엘로디의 뜻을 존중하기 위해 자리를 피해 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나. 사업 논의 내내 관심 없는 듯 졸음만 참던 엘로디는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쏜살같이 크룬델 저택을 빠져나왔다. 미련이 남는 눈으로 제 딸을 보던 크룬델 공작의 얼굴이 생각났다.
역시 레온 크룬델은 엘로디의 상대로 어울리지 않는다. 이윽고 마차가 진입한 곳은 고급 상점 구획인 트와네트 거리였다. 익숙한 가게들을 훑어보던 엘로디가 공작을 돌아보며 물었다.
“뭐 살 거라도 있으세요? 그럼 부관을 시키시면 될 텐데요.”
엘로디는 순간 숨 쉬는 것도 잊어 버렸다.
페르디아 공작이 한 말이라기에는 정말이지 낯간지러운 대사가 아닌가.
실베스터는 제 말에 놀란 엘로디를 데리고 마차에서 내렸다. 이번에는 혼자 폴짝 뛰어내리지 않도록 먼저 내려서 에스코트해 주었다. 부끄러운지 발갛게 달아오른 엘로디의 양 뺨이 사랑스러웠다.
페르디아 부녀의 등장에 트와네트 거리가 한바탕 들썩였다. 실베스터 페르디아는 제국에서 가장 돈이 많은 존재였고, 그가 공작 부인과 함께 트와네트 거리에 뜰 때마다 방문한 가게 매상이 천장을 뚫었기 때문이다.
거리로 구경나온 상인들이 쑥덕거리며 페르디아 부녀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실베스터는 범상치 않은 인간이었다. 그는 정말로 트와네트 거리를 쓸었다. 엘로디의 눈길이 잠깐이라도 닿은 것이라면 모두 사들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페르디아 공작의 장단에 맞춰 쇼핑을 즐기던 엘로디의 표정이 점점 파리해졌다.
“페르디아에게 ‘너무 많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엘로디.”
“똑같은 말이지 않으냐. 자, 다음 가게로 가자꾸나.”
엘로디는 질린 얼굴로 공작의 뒤를 따랐다.
엘로디가 저를 어떻게 쳐다보는지도 모른 채 실베스터는 그들을 주시하는 기자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페르디아의 가주와 딸의 사이가 아주 돈독하다는. . . . 다음 날, 실베스터의 예상대로 기사가 실렸다. [레온 크룬델 공작과 레이디 페르디아의 핑크빛 소식이 솔솔? 실베스터 페르디아 공작도 허락한 관계…….] 기사가 실리긴 실렸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꾸깃……. 실베스터의 손아귀에 신문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후후, 그 광경을 지켜보던 테미스가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요요하게 웃었다.
“어머. 젊은 놈에게 순서를 뺏기고 말았네요, 각하.”
그 말대로였다.
117화. 하나도 안 닮았어
6–8 minutes

완벽에 가까운 실베스터 인생에서 기록할 만한 패배였다. 기사 한 줄 실리려고 일부러 보란 듯 엘로디를 이끌고 트와네트 거리까지 갔건만, 공을 전부 레온 크룬델 그놈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미 신문을 읽어서 내용을 알고 있는 테미스는 여전히 기사 헤드라인을 노려보고 있는 실베스터를 향해 가볍게 물었다.
“오보로 남을지, 혹은 진실이 될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겠지요. 둘 다 젊잖아요.”
툭, 구깃구깃해진 신문을 내팽개치듯 내려놓은 실베스터가 아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웃는 얼굴로 받아칠 준비가 되었다는 듯 마주 보았다.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실베스터는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이런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자고 테미스를 부른 게 아니었다.
상대가 이미 모든 걸 예상하였다는 걸 알기에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오랜 고민 끝에 실베스터는 어렵사리 운을 떼었다.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테미스가 눈웃음을 지었다. 실베스터는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았다.
“엘로디가 내 친딸이 아니라는 것. 물론 그대는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뒤에 붙인 실베스터의 추측에 확신을 주듯 테미스는 아주 잠깐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을 뿐 격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남편의 의중을 떠보듯 부채를 살랑거리며 중얼거리던 테미스가 이내 탁, 하고 부채를 접었다.
테미스는 어느 날 페르디아의 가주를 찾아왔다던 내연녀를 이미 알고 있었다. 오만하고 차가운 성정의 실베스터 페르디아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평민 여자. 그 여자는 실베스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그것도 모르고 계약 결혼을 제의할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손해 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만큼 계약 대상에 대한 조사를 사전에 철저히 진행한 결과였다. 더구나…….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요. 리리 그 아이, 생김새부터 타고난 성격까지 각하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잖아요?”
허를 찌르는 말에 실베스터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친모를 닮았다고 해도 정도가 있죠. 너무 안 닮았어요.”
기어코 테미스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안 닮았다’는 말을 무려 세 번이나 했다. 실베스터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물론 그것 말고도 추측할 수 있는 단서는 많았어요. 누가 친딸을 그렇게 어려워해요?”
그는 혹시나 첫사랑의 딸이 저를 두려워할까 봐 별채에 꼭꼭 숨겨 놓고는 얼굴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 딴에는 엘로디에 대한 배려라고 여겼던 일들은 모두 아이를 외롭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건강하게 태어난 첫째 아들 얀시에 비해 갓난아기였던 엘로디는 너무나 작았다. 행여 잘못 힘이라도 줄까 봐 두려울 정도로.
테미스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 말문을 떼지도 못한 요람 속 엘로디를 내려다보았을 때였다. 손 닿으면 그대로 녹을 것 같은 보송보송한 배냇머리,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꽃잎 같은 연분홍색 눈동자.
‘이 어두침침한 페르디아에 웬 천사가 내려왔나 싶었지.’
그래서 그녀는 한동안 아기를 말없이 내려다보았었다. 물론 엘로디는 그 만남을 기억도 못 할 테지만.
“각하의 친딸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권능을 발현했다고 그 아이가 말했을 때는 사실 좀 놀랐답니다. 친모는 평민이니 친부가 4대 가문 중 한 명일 거라 생각했죠.”
그 생각이 들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치는 실베스터를 보며 테미스가 조소했다.
“그렇게 억울하시면 각하께서 그 아이를 낳으셨어야죠.”
실베스터가 어이없다는 듯 테미스를 보았다. 좀처럼 보이지 않는 솔직한 반응에 테미스는 다시 부채를 펴 입가를 가리고 고아하게 웃었다.
용서를 구하는 자리니 실베스터는 어떤 항변도 할 수 없었다. 이 자리에서 절대 갑은 테미스 페르디아였다. 잠깐 그 권위를 즐기던 테미스의 얼굴에서 이내 웃음기가 사라졌다.
“처음부터 제게 사실대로 말씀하셨으면, 리리를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을 거예요.”
“제가 각하께 그만한 신뢰를 드리지 못했다는 거겠죠.”
서로 이해관계를 따져 성사된 계약 결혼. 페르디아의 후계자인 얀시를 낳았지만 첫사랑이 찾아와 맡긴 아이의 출생을 밝힐 정도로 신뢰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내가 그 핏덩이에게 해를 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거겠지.’
테미스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무엇보다 페르디아에 남편의 내연녀가 찾아왔다는 소문을 먼저 접했다. 그 이후 실베스터가 테미스를 찾아와 아이에게 간섭하지 말 것을 이르고 떠났다. 거래로 이루어진 결혼이니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들의 사이에는 어떠한 애정의 감정도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해를 입히려 생각한 적도 없는데 견제당하는 기분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다. 그래서였다. 테미스가 보란 듯 엘로디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오기 따위 접어 둘 것을. 엘로디는 그들의 관계에 휘말려 방치당한 것과 다름없었다. 화려한 부채 사이, 테미스와 실베스터의 시선이 마주쳤다.
여전히, 연정은 없었다. 다만 두 아이를 낳고 함께 기른 부부 사이에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동지애가 있었다. 어느 선까지의 허물은 서로 못 본 척 눈감아 줄 수 있는 배려도.
“그때, 테미스 그대와 결혼한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걸 실감해.”
테미스가 후후 웃었다.
“빈말로도 최고의 선택이었다고는 안 하시네요. 뭐, 그건 저도 마찬가지니까요.”
페르디아 공작의 부인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넣게 된 것. 그것 말고 최선의 선택이 있었을까. 테미스는 여전히 청년 시절의 기품을 유지하고 있는 제 남편을 바라보았다. 용서를 구한다고 했던가.
테미스가 선언하는 찰나의 순간. 미묘하게 굳어 있던 실베스터의 표정이 한순간 누그러졌다. 테미스는 그 모습이 마치 안도하는 얼굴 같다고 느꼈다. 테미스는 한 가지 의문을 품었다. 20년이 지나는 동안에 한마디도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용서를 구한다? 필시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 계기는 당연히-.
엘로디 페르디아일 것이다. 부정하거나 숨길 생각이 없는 실베스터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리리도 제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거겠군요?”
친부라 믿고 있던 사람이 사실 제 친부가 아니고, 가문 사람들은 그저 차디차기만 했던 엘로디의 여름. 엘로디는 절망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상황을 벗어나기를 택했다.
강한 아이였다. 해독제를 만들어 판매한 돈을 독립자금 삼아 저택을 나가겠다는 계획까지 세우지 않았나. 제 세계를 뒤흔드는 출생의 비밀을 알았으니 혼자 감당하기도 힘들 텐데, 엘로디는 테미스의 마음까지 생각했다.
“그 와중에 남 걱정이나 하다니, 정말로 착해빠졌네요.”
실베스터가 흡족한 듯 동조했다. 하지만 그는 이어진 테미스의 말에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페르디아의 아이로 있기에는 착하고 순수한 아이예요. 정말 하나도 안 닮았어요. 각하께서도 알고 계시겠죠.”
이번까지 해서 ‘안 닮았다’는 말 네 번째. 도대체 언제까지 망할 안 닮았다는 말을 욀 심산인가.
실베스터는 차마 홀로 그렇게 생각해 왔다는 사실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어쨌든 어느 한구석은 닮았다. 테미스는 고집스러운 남편을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 <창공의 매 용병단> 솜니아 지부. 흥미로운 기사를 읽은 부단장 마리오는 보고를 핑계 삼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단장실에 들어섰다. 그의 까칠한 단장은 오늘도 통신 마도구를 눈에 바로 보이는 곳에 두고는 서류 작업 중이었다. 오직 한 사람과 통신하는 통신 마도구. 언제 연락이 오든 곧바로 받을 수 있도록.
저 순애보를 부디 리리 아가씨께서 알아주셔야 할 텐데. 마리오는 명분용으로 가져온 서류 위에 신문을 함께 겹쳐 내려놓았다.
“오늘도 솜니아는 뜨겁네요. 우리 리리 아가씨 인기가 대단하시다니까요. 벌써 몇 번째 스캔들이랍니까? 1황자와 파혼하고 2황자와 스캔들 터지고, 이번에는 크룬델 공작이라네요!”
마리오가 싱글벙글 웃으며 신나게 입을 털었다.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레이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힘껏 깐족거리며 말하고 있을 그때. 휙!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마리오의 얼굴을 벨 듯 쏜살같이 스쳐 갔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마리오가 눈알만 데구루루 굴려 아래를 보았다. 서류 위에 보란 듯 포개 놓았던 신문이 없었다.
“지금 시, 시, 신문을 칼처럼 날리신 겁니까? 무려 저한테요?”
마리오가 소름이 돋아 버린 제 팔뚝을 감싸 안으며 새침하게 소리쳤다.
“기껏 단장 걱정해서 가져왔더니, 구박만 하고 말이야. 미워…….”
마리오가 투덜거렸지만 레이안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모습을 빤히 응시하던 마리오가 진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리리 아가씨가 이렇게 인기가 많은데 가만있으실 겁니까?”
마리오는 레이안의 오랜 추종자이자 심복이었다. 그가 세력을 모아 용병단을 창설할 때부터 함께였던 창단멤버이기도 했다. 부단장은 단장의 또 다른 눈과 귀가 되었다. 당연히 마리오는 레이안이 비에탄 가문의 유일한 후예라는 것은 물론이고 페르디아 가의 아가씨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삶의 모든 목표가 엘로디 페르디아인 것처럼 굴면서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나서지 않는다. 마리오는 그게 못내 답답했다.
마리오는 표정 변화 없는 상사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 보았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레이안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어진 마리오가 보고도 하지 않고 코웃음을 치며 나갔다. 또다시 집무실에 홀로 남은 레이안은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집중이 되지 않았다. 문득 크룬델 공작의 조사 보고를 위해 만났을 때 엘로디와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자와 어떤 식으로 가까워질 생각입니까? 혹, 미인계라도 쓰실 겁니까?”
어쩌면 이 스캔들은 엘로디의 계획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제 평판이 어찌 되든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도무지 서류 작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엘로디를 만나고 싶다. 하지만 그건 바란다고 이뤄지는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만남은 대개 엘로디가 그를 먼저 찾아야 성립되는 것이었다. 몇 번이나 고민을 거듭하던 레이안은 통신 마도구를 들었다. 오래지 않아 통신이 연결되었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엘로디가 놀란 듯 물어왔다.
배시시 웃는 얼굴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레이안은 통신 마도구를 노려보듯 응시했다. 당신은 이렇게 누구에게나 다정한 거지. 그게 나라서가 아니라. 그 순간 한 가지 의문이 머리를 치고 올라왔다.

118화. 새벽녘의 잔별, 혹은 봄날의 햇발일까
5–7 minutes
레온 크룬델은 책상 위 가지런히 놓아둔 쪽지를 가만히 응시했다. 흘려 쓰듯 유려하게 적힌 글씨는 주인의 성격을 그대로 투영하는 듯했다. 레온은 쪽지를 건네며 상대방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고민할 시간을 드릴게요. 일주일. 그 이상은 안 돼요.”
부탁하는 어조로 협박하는 주제에 사랑스럽게 웃는 엘로디 페르디아의 미소는 제법 천사 같았다. 새벽녘의 잔별, 혹은 봄날의 햇발일까. 엘로디 페르디아는 그 어떤 세상 모든 예쁜 단어를 가져다 대도 어울릴 사람이었다. 물론 겉모습으로만 판단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레온 크룬델은 직접 겪어 보기 전에는 함부로 타인을 재단하지 않았다. 엘로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페르디아의 사생아인 그녀는 성격이 원만하지 않아 온갖 사건·사고를 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리 귀담아듣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정반대로 변한 평판이 흥미로워 조금 관심은 있었다. 분명 멸시당하던 때가 있었는데, 엘로디는 그 시선을 한 번에 불식시켰다. 그리하여 이슈타르가 선택한 구원자는 이제 윌렌티아의 등불로 불렸다.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제 부친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방긋방긋 웃으며 제 약점을 쥐고 흔들었다는 사실을. 직접 겪어 보기 전에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직접 겪어본 엘로디 페르디아는-.
껄끄럽고 불편한 존재였다. 패악질을 부리고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는 소문과는 전혀 다르지만, 다른 의미로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단 한 번의 방문으로 저와 엘로디의 약혼설이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새삼 사교계에서 엘로디의 존재감과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페르디아의 망나니라 불렸던 그 시절에도 엘로디가 착용하는 장신구나 드레스 스타일이 유행이 되기도 할 정도였으니. 레온은 쪽지를 들어 올렸다. 아직 일주일이 지나려면 시간이 남았다. 그냥 무시할까 생각했지만 엘로디가 제게 했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제가 각하께서 찾고 계시는 분을 수색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거래니까요.”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다. 그동안 레온은 여동생 벨리사의 수색을 은밀히 진행해 왔다. 다른 이들은 모두 벨리사 크룬델이 죽었다고 믿고 있었다. 실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아는 건 가문 내 신뢰할 만한 측근들 몇 명뿐이었다. 그토록 은밀히 움직였는데 덜미를 잡히다니. 그것도 페르디아 가문의 공녀에게. 하지만 누구를 찾고 있는지까지는 알지 못할 것이라 추측했다. 아마 저를 떠보는 것일 터. 레온이 상념에 잠겨 있을 그때였다. 느릿하면서도 기이한 음성이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나태. 레온 크룬델와 계약한 7대 죄악 중 하나가 끊임없이 충동질하고 있었다. 죄악과 계약하며 정신과 능력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탓에 레온의 생각은 모조리 나태에게 읽힐 수밖에 없었다.
레온은 연신 누군가를 죽이라며 중얼거리는 나태의 음성을 애써 무시했다.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음성에 가끔은 미쳐 버릴 것만 같은 때가 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려던 레온이 흠칫 동작을 멈추었다. 순간 왼쪽 어깨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계약의 대가로 레온은 제 육체를 나태에게 넘겼다. 심장에서부터 박동하며 점점 잠식되어 가고, 이내 모든 육체의 부위가 완벽히 암흑에 물들 때 이 계약은 끝이 난다.
그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이 몸뚱이가 완전히 먹히기 전에 벨리사를 찾아야 했다.
어딘가에서 살아 있는 유일한 혈육의 이름을 되뇌며 레온은 고통을 참았다. 그가 나태와 거래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나태의 능력인 꿈. 그 힘을 통해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는 동생의 꿈속에 들어가 생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벨리사의 꿈속에서 보이는 풍경이라곤 어둡고 더러운 지하실이 전부지만, 꿈에 진입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살아 있다는 반증이었으니까. 레온은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제 신념을 버리고 죄악과 거래했다. 그는 오늘도 벨리사가 무사한지 확인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심장이 느리게 박동했다. 육체가 죽어 가는 감각이었다.

***
레온의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야말로 기묘했다. 타인의 꿈속에 진입한 경험을 숫자로 세자면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이토록 특이한 세계는 처음 보았다. 하늘을 찌르는 듯 높은 사각형의 건물이 빽빽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이상하게 생긴 마도구가 자신을 통과해 지나갔으며, 이상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온갖 소음들이 밀려 들어와 그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꿈인데도 이상하게 현실감이 넘쳐서 상상 속 세계 같지 않았다. 그것도 잠시, 주위가 찌그러지듯 일그러지며 풍경이 삽시간에 바뀌었다. 언제 이상한 세상을 목격했냐는 듯 새로이 나타난 공간은 레온에게도 제법 익숙한 생활 양식의 장소였다. 물론 처음 보는 공간이었지만.
확실한 건 벨리사의 꿈은 아니다. 주변을 살핀 레온은 퇴창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한 소녀를 발견했다. 다섯 살 정도 되었을까. 화려한 펜던트를 보물이라도 되는 듯 꼭 쥐고 있는 아이는 하염없이 창밖만 쳐다보았다. 등을 지고 있어서 연한 금발 머리칼을 가졌다는 것밖에 알 수 없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외롭고 쓸쓸해 보여서 저도 모르게 손을 뻗던 레온은 멈칫 한 발짝 물러났다.
그렇다면 이 꿈의 주인은 창밖을 바라보는 저 작은 소녀일 터. 그때 누군가 레온의 몸을 쓱 통과해 지나갔다.
“아가씨. 추운 곳에 오래 계시면 감기 걸리셔요. 창 근처가 얼마나 추운데요?”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레온은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소녀의 연분홍색 눈동자가 멍하게 깜빡거렸다. 그는 그 소녀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엘로디 페르디아였다. 어린 엘로디는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유모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유모가 상냥하게 웃으며 아이의 옆에 쭈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추었다. 엘로디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물었다.
물음이 끝나기 무섭게 유모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그녀는 두 손으로 엘로디의 어깨를 붙잡고는 다그치듯 외쳤다.
그런 격한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건지 놀란 엘로디의 눈이 커졌다.
“친엄마에 관한 이야기는, 행여라도 입 밖으로 내시면 안 돼요. 가주께서 경을 치실 거예요!”
“이러다 저 쫓겨날지도 몰라요. 아가씨, 제발요……. 네?”
유모의 간절한 음성에 엘로디는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이었지만, 결국 물음을 삼켰다.
엘로디는 입을 꾹 다물고는 선선히 유모의 손을 잡고 긴 복도를 지나갔다. 레온은 멀어지는 작은 등을 바라보았다. 소문으로 들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녀의 친모가 보에 감싼 아이를 페르디아에 데리고 온 후 돈을 받고 먼 곳으로 떠났다는 사실. 하지만 소문으로 접한 것과 꿈을 통해 직접 보고 듣는 건 다르게 와 닿았다. 레온은 문득 어린 나이에 모든 가족을 잃고 공작위에 올랐던 그때를 떠올렸다. 당시의 감정이 떠오르는 것은 어째서일까. 홀로 창밖만 바라보던 엘로디에게서, 집무실 창밖을 내다보던 과거의 제 모습이 보였다. *** 요즘 들어 꿈자리가 영 뒤숭숭했다.
그런데 깨고 나면 어떤 꿈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렴풋이 옛날 꿈을 꾸었다는 것만 인지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푹 잠들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았다. 최근 신경 쓰이는 일 때문에 낮이고 밤이고 편하게 지낼 수가 없었으니까. 원흉은 다름 아닌…… 레온 크룬델 공작이었다.
오늘도 역시 크룬델 공작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오늘이 바로 기한을 통보했던 일주일째 되는 날인데도. 언제 연락이 올지 몰라 통신 마도구를 끼고 살고 있으려니 짝사랑하는 상대의 연락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불쌍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영 별로였다.
어쩐지 불안했다. 애초에 나는 크룬델 공작을 신전에 고발할 생각도 없었다. 나만 해도 탐욕의 능력을 사용하고 있으니, 죄악과 계약했다는 이유로 고발할 자격이 없지 않은가. 단지 빠른 거래를 위해 다소 강제적인 방법을 선택했을 뿐이었다. 나는 여우 주제에 내 간식들을 신나게 먹고 있는 돼지, 아니, 죄악을 불렀다.
“돼지야. 죄악과 계약한 사람한테 다른 죄악 능력을 쓰면 어떻게 돼?”
[그건 나도 모름. 너 같이 계약도 안 하고 부려 먹는 경우는 나도 처음이기 때문임.]
챱챱챱. 대충 대답한 탐욕이 탐욕스럽게 간식을 마저 먹었다.
챱. 인간 음식만 축내는 탐욕은 그냥 내버려두고 홀로 고민에 잠겼다. 아무래도 크룬델 공작에게 탐욕 능력을 쓰는 건 자제하는 게 좋겠다. 지금까지는 내가 그자의 약점을 쥐고 있는 편이 좋을 테니까.
‘또 페르디아 공작한테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해야 하나?’
하지만 본의 아닌 약혼 기사가 터져 버려서 대놓고 만나는 건 영 껄끄러웠다. 이렇게 된 거 그냥 미인계라도 쓸걸 그랬나. 오히려 레온 크룬델처럼 신중한 인간에게는 시간을 좀 들였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마음이 급한 탓이지.
‘그런데, 애초에 내가 유혹한다고 넘어올 리가 없잖아?’
두 손으로 턱을 괴고 한숨을 푹 내쉴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마자 탐욕이 펄쩍 뛰어올라 내 품에 와락 달려들었다.
침실에 들어온 마사의 손에는 쟁반이 들려 있었다. 분명 오늘 들어온 서신은 답장을 써서 전부 처리했는데? 쟁반 위 서신은 단 한 장뿐이었다.
초대장을 집어 든 나는 가장 먼저 겉면에 적혀 있을 발신인을 확인했다. 마사의 말대로 보낸 사람이 없는 서신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서신의 봉인을 뜯어 내용을 살핀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무려 ‘마담 몽고메리의 가면무도회’ 파트너로 참석해 달라는 초대장이었다. 마담 몽고메리의 가면무도회는 익명성에 기대어 자유분방하고 다소 방탕한 분위기로 유명했다. 그 아래 적혀 있는 건, 내 통신 마도구 코드였다. 공교롭게도 오늘, 그런 식으로 서신을 보낼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나는 혼돈에 빠졌다. 왜 편한 통신 마도구를 두고 굳이 가면무도회 파트너를 청한 거지? 뭔가 중요한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게 틀림없었다.

119화. 제 파트너입니다
5–7 minutes

왜 굳이 무도회로 불러냈는지 이유를 묻고 싶어도 크룬델 공작의 통신 마도구 코드를 모르는 이상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섣불리 서신을 보낼 수도 없었다.
‘기자들한테 덜미라도 붙잡히면, 결혼설에 힘을 실어 주는 꼴이니까.’
나는 결혼 생각도 없는데, 다들 왜 이렇게 남의 연애에 관심이 많은 건지 모르겠다. 가면무도회에 참석하기로 결정하고 나니 준비해야 할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나는 곧바로 마탑주 이시스에게 통신을 연결했다. 그런데 연결되자마자 날카로운 고함이 고막을 세차게 때렸다.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흐르더니 이내 통신구 너머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너였느냐? 몰랐다. 크흠, 소속 마법사 놈들인 줄 알고.]
대체 소속 마법사들, 어떤 근무 환경에서 일하고 계신 건가요.
“부탁드릴 게 있어서 연락드렸는데, 바쁘시면 알아서 해결-.”
연구하는 마탑주님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얼른 통신을 해제하려는데, 불호령이 떨어졌다.
[바쁘긴 해도 네 부탁 들어줄 시간 정도는 있느니라!]
말하기 전에는 놓아주지 않을 기세라 나는 어쩔 수 없이 용건을 말했다.
“그럼 염색 마법 시약 하나만 보내 주실 수 있으세요?”
[흥,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고작 그깟 걸로 내게 연락했느냐?]
이시스는 자기 할 말만 하고는 냅다 통신을 끊어 버렸다. 나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통신 마도구를 쳐다보았다.
“까칠하거나 친절하거나 하나만 해 주셨으면 좋겠다…….”
*** 마담 몽고메리는 늙은 대부호 귀족과 결혼한 가난한 가문의 영애로, 결혼한 그날 밤 남편이 죽고 과부가 되었다. 늙은 남편도 죽자 가문의 엄청난 재산은 모두 아내가 고스란히 상속받게 되었다. 그 이후로 젊은 부인은 매주 한 번씩 밤에 가면무도회를 개최했고, 부인 대신 마담 몽고메리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했다. 젊은 남녀들이 참석해서 환담과 향락을 즐기는 개방적이고 이색적인 분위기의 무도회. 가 본 적도 없고, 갈 생각도 한 적 없는 무도회였다. 워낙 예민해서 별채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으니 당연히 다른 가문에서 주최하는 파티들은 모두 가지 않았고, 그나마 공식 행사에만 얼굴을 비추었다. 황자의 약혼녀라는 지위가 있으니 최대한 행실에 주의를 기울이기도 했다. 주의를 기울였다기엔 헛소리 지껄이는 영식들을 좀 패긴 했지만…….
무도회에 가기 위한 치장을 도와준 마사가 서랍에서 가면 하나를 꺼내 왔다.
“에이. 이게 뭐가 화려해요. 아가씨가 가신다는 곳이 마담 몽고메리 무도회죠? 거기 공작새 깃털까지 덕지덕지 붙여서 오는 사람들이 허다해요.”
마사의 말을 듣고 보니 눈매를 가리는 흰색의 가면이 제법 수수해 보였다. 나는 가면을 눈에 가져다 대며 마사에게 물었다.
그러자 마사가 기가 찬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가면 하나로 어떻게 사람을 못 알아봐요? 물구나무서서 봐도 아가씬데요!”
이렇게 단호할 필요까지는 없는데. 가면을 쓰면 어느 정도는 정체를 감출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내 예상이 빗나갔다. 역시 염색 마법 시약으로 눈동자 색을 바꾸기로 계획한 건 잘한 생각이었다. 채비를 다 끝마치자 마사가 흡족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이 정도면 가면무도회라도 우리 아가씨가 제일 주목받을 거예요!”
마사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며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도회는 왜 참석하시려는 거예요? 원래 그런 자리 안 나가시잖아요.”
“잘 생각하셨어요. 그동안 아가씨 너무 재미없게 살았잖아요. 가서 재밌게 놀다가 오세요!”
마사는 힘차게 응원을 남긴 후 밖으로 나갔다. 독설인지 격려인지 알 수 없었다. 창밖을 보니 슬슬 해가 지고 있었다. 출발할 때가 다 되어 슬금슬금 테이블 위에 올라가 간식거리들을 먹고 있는 탐욕을 불렀다.
탐욕은 바락 소리를 치면서도 순순히 봉인석 안에 들어갔다. 나는 준비한 염색 마법 시약과 가면을 잘 챙겨 놓은 후 문가로 향했다. 부지런한 레이안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막 문밖을 나서는 순간, 노크하려고 어정쩡하게 손을 들고 있는 카를로트와 마주쳤다.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신나게 말하던 카를로트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 오늘, 카를로트 페르디아는 만반의 준비를 했다.
“날씨, 조금 춥지만 괜찮고. 장소 선정? 끝내 주고. 나? 나야 늘 완벽하고.”
거울을 보고 외모 점검까지 마친 후에야 카를로트는 가벼운 발걸음을 떼었다. 오늘 카를로트는 엘로디에게 무려 같이 외출하자고 권할 생각이었다.
‘리리 누님은 예쁜 걸 좋아하니까, 분명 야경도 좋아할 거야.’
그렇게 잔뜩 들떠서 엘로디를 만나러 왔건만.
엘로디는 이미 외출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무도회라도 참석할 모양이었다.
이럴 수가. 카를로트의 완벽한 계획이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속상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기운 없이 늘어졌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매가 축 처지자 그야말로 비 맞은 고양이처럼 안쓰러웠다.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엘로디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반짝! 엘로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를로트의 눈이 과하게 빛났다.
엘로디는 한 발짝 물러나며 후회했다. 아무래도 괜한 말을 한 것 같았다.
엘로디의 강철 철벽에도 카를로트는 굴하지 않고 그녀의 옆에 딱 달라붙었다.
카를로트가 또 불쌍한 척하며 엘로디를 졸랐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단호하게 답했다.
“그럼 어디 가는지만 알려 주라. 따라간다고 안 할게. 나만 알고 있을게. 응?”
엘로디의 취향을 파악해서 다음 외출 신청 때 써먹으려는 속셈이었다. 카를로트의 말에 계속 안 된다고만 대답하느라 마음이 불편했던 엘로디의 마음이 약해졌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 카를로트가 당황해서 얼어붙은 사이, 엘로디가 붙잡힌 팔을 슬그머니 빼냈다.
산뜻한 인사를 남긴 엘로디가 카를로트를 등지고 재빠르게 복도로 향했다.
경악한 카를로트가 중얼거렸다. *** 정황상 크룬델 공작이 보낸 익명의 서신이었지만, 그게 확실하다는 보장이 없었다.
혹시 모를 가능성에 대비해서 나는 레이안에게 도움을 청했다. 몰래 따라붙어 호위해 달라는 내 요청에 레이안은 당연하다는 듯 나를 따랐다. 레이안과 내가 탄 마차는 마담 몽고메리의 저택 앞에 다다랐다. 파트너로서 초대장을 받은 건 나뿐이지만, 레이안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둠 속성의 비에탄의 권능으로 얼마든지 기척을 숨기고 숨어들 수 있었으니까. 마차에서 내리기 전 이시스에게 부탁해서 받은 염색 시약으로 눈 색을 바꾸었다. 연분홍색이던 내 눈동자가 순식간에 벽안으로 바뀌었다. 가면까지 완벽하게 쓴 후, 나는 레이안에게 물었다.
당연히 못 알아보겠다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레이안은 한 치의 고민도 하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깜짝 놀라 거울로 내 모습을 살폈다. 다소 주관적일지도 모르지만 내 눈으로 봤을 때도 눈동자 색이 바뀌어서인지 웬만해서는 내 정체를 못 알아볼 것 같았다. 가면을 썼다 벗었다 하는 나를 보며 레이안이 무심하게 물었다.

레이안의 말대로였다. 누구도 아닌 레이안만큼은 나를 알아볼 수 있었다. 차원을 헤매며 윤가을이던 나를 알아보고 이 세계로 데려온 당사자에게 대체 무슨 질문을 한 걸까,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왠지 레이안과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무슨 생각을 하든 내 속마음을 들킬 것 같아서. *** 마담 몽고메리의 가면무도회는 기대했던 것보다는 크게 문란하지 않았다. 참석자들의 연령대가 다소 어리고, 남녀 뒤섞여 스스럼없이 춤추고 대화를 나누는 정도일까. 가면을 쓰고 있어서인지 사람들의 행동이 과장되어 보이긴 했다. 가면무도회는 서로 신분을 밝히지 않기 때문에 입장할 때 호명하지 않았다. 일부러 조용히 입장한다고 했는데, 홀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쏠렸다. 공식 행사에 참석했을 때도 내게 시선이 따라오는 건 익숙했기에 당황하지 않고 눈에 띄지 않는 구석 벽에 기대섰다.
걱정도 잠시, 나는 레이안이 아니라 스스로를 걱정할 때라는 걸 깨달았다.
“달콤한 술을 마시며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만.”
“파트너가 안 계시는 듯한데, 괜찮으시다면 제가 레이디의 파트너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순식간에 열 명이 훌쩍 넘는 남자들이 몰려와 나에게 이것저것 권하기 시작했다. 나는 멀뚱히 서서 가면 쓴 남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자세히 보니 제법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알았다면 겁도 없이 이렇게 추근거릴 수 없겠지. 확신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다들 나한테 걷어차이고, 머리채 뜯겨 본 적 있는 사교계의 유명한 탕아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골치 아프게 되었다. 신분을 밝힐 수 없는 지금, 저들의 머리채를 뜯어 놓을 수는 없었으니까.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변조하며 입을 열었다.
“혼자 입장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무슨 소리실까?”
탕아 중에서도 질 낮은 놈이 비아냥거리듯 한 소리 하던 그때였다.
남자들 사이를 가르고 유독 키가 큰 남자가 다가와 에스코트하듯 내 손을 쥐었다.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내게만 들리게 나직한 음성으로 귓속말했다.
들어 본 적 있는 익숙한 목소리. 레온 크룬델 공작이었다.
121화. 가는 곳마다 사건 사고
5–7 minutes

언젠가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나는 서둘러 기억 속을 더듬었다. 어디서 들었더라? 어디서? 아. 떠올랐다.
앙겔로스 공작과 도로테아 옆에 있던 남마탑주였다. 지난번 건국제 제의에서 도로테아가 쓰러지자 내가 주관하도록 부추긴 인물이기도 했다. 앙겔로스 공작과 긴밀하게 연관된 사람인 만큼 조심해야 하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나는 혹시 내가 알 수 없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 탐욕을 불렀다.
이상했다. 언어의 경제성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떠드는 것 좋아하는 탐욕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내가 부르기까지 했는데 안 나온다고? 나는 상대방에게 보이지 않게 드레스 속에 감춰 둔 통신 마도구를 쥐었다. 여차하면 근처에 매복하고 있을 레이안에게 신호를 보낼 작정으로. 우선은 눈앞의 남자가 무슨 목적으로 접근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나는 아까 몰려든 날벌레들을 쫓아낼 때 그랬던 것처럼 평소와 다른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얼굴이라도 볼까 해서 왔는데, 하필 가면무도회라 아쉽게 되었군.”
신분을 밝히지 않기 위한 내 노력에도 남자는 내 신분을 알고 있다는 티를 있는 대로 냈다. 기껏 눈동자 색까지 바꾸었지만 상대가 이미 정체를 알고 있다면 소용없는 짓이었다. 나 역시 능청 떠는 태도를 버리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렇게 호의적이지는 않은 내 반응에도 게이브는 퀭한 눈으로 나를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벌레가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듯한 착각이 이는, 기분 나쁜 시선이었다. 게이브의 보라색 눈동자로 내 모습이 언뜻 비쳤다.
비아냥 섞인 내 말투에도 게이브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치 투시하듯 나를 빤히 쳐다보며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담담히 말했다.
웬 조언? 내가 작게 중얼거리자 게이브가 한 발짝 다가와 낮은 음성으로 읊조렸다.
저승의 신이라면 이르칼라. 이 세상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존재였다. 내가 이르칼라와 대적할 존재라는 걸 아는 사람은 나와 레이안이 전부였다.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한마디 덧붙였다.
이 남자, 도대체 의도가 뭘까. 보라색 눈을 오랫동안 쳐다보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아마 가면이 없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때였다. 발코니 문 너머로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취객을 처리하러 갔던 크룬델 공작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긴장했던 마음을 조금 놓았던 게 실수였을까. 게이브가 한 발짝 물러나며 한마디했다.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이었다. 꺄아악! 저택 안쪽에서부터 귀가 찢어질 듯한 높은 비명이 들려왔다.
촤아악! 커튼을 걷자 실내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비규환이 된 연회장 한구석이 불타고 있었다. 모두 혼비백산 되어 뒤엉켜 달아나는 사이 무언가 눈에 띄었다. 그건-.
마수가 왜 있는 거지? 수도의, 그것도 귀족의 저택 실내에 갑자기 마수가 출몰한다고? 그런 경우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그냥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개를 휙휙 돌린 나는 찾던 것을 발견했다. 균열. 벽난로 앞에 아주 작지만 공간이 찢겨 있었다. 저 틈으로 마수가 튀어나온 게 분명했다. 그 순간 떠오른 건 느닷없이 선물을 주겠다는 게이브 제나이드의 목소리였다. 황급히 뒤돌아보았지만, 게이브는 온데간데없었다.
‘역시, 건국제 때 나타난 균열도 이 인간 짓인 게 분명해.’
저승의 신 운운하는 걸 보니 게이브 제나이드 또한 이르칼라와 관련된 존재인 듯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연회장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어쩌다 불이 붙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수 높은 술과 카펫을 땔감 삼아 저택이 활활 불타고 있었고, 균열에서 마수 두 마리가 더 튀어나와 사람들을 위협했다.
“거, 걱정하지 마십시오, 레이디. 제가 막겠습니다!”
용기 있지만 어리석은 영식들이 촛대를 들고 마수들을 가로막다가 마수의 손짓 한 방에 종이 인형처럼 팔랑거리며 나가떨어졌다.
놀란 레이디들이 비명을 질렀다. 나도 모르게 한 발짝 나섰을 때, 그런 내 앞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다.
아직 레이안에게 신호를 보내지 않았지만, 상황이 심각하니 은신을 풀고 내게 다가온 듯했다. 가면무도회장인 이곳에서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 레이안의 모습은 이질적이었지만, 모두 도망가느라 정신이 없어서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마수가 날뛰는 모습을 한 번 훑은 레이안이 내게 권했다.
“당신이 이곳에 온 걸 아는 사람이 없으니 이대로 나가도 상관없을 겁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릴 필요 없지 않습니까.”
레이안의 말대로였다. 거기다 수도 안에서 벌어진 일이니만큼 금방 황실에서 기사단을 파견할 것이고, 작은 균열이니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게이브 제나이드가 준 ‘선물’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
이대로 나가자고 권했으면서,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는 걸 알았는지 레이안은 금세 물러났다.
쓱,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레이안은 도망치던 한 영식의 가면을 낚아채 얼굴에 썼다. 상대는 제 가면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허겁지겁 밖으로 달아났다.
가문이 몰락하고 혈혈단신이 되어 하급 용병으로 겨우 먹고살았다고 했으니, 뒷골목을 전전하며 손기술을 익힌 모양이었다. 가면이 불편한지 가장자리를 매만지며 레이안이 물었다.
지난번 건국제의 경험으로 봤을 때, 분명 균열의 원인이 되는 매개체가 있을 것이다. 그때는 제단이었는데, 지금은 뭐지? 균열의 크기가 작아서 그런 걸까. 눈으로 살폈을 때는 수상한 부분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리자 크룬델 공작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내 옆에 있는 레이안을 경계하며 물었다.
“그렇습니까. 호위가 있다니 차라리 다행입니다. 하면 송구한 말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죄송하지만 공녀, 저는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할 듯합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건만 크룬델 공작은 마수 출몰 사실을 황성에 알리고, 사람들의 대피까지 돕고 있었던 듯했다. 레온 크룬델은 정말이지 이타적인 인간이었다.
개인적인 이유로 남겠다고 말하는 나와 다르게. 내가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는지 크룬델 공작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막상 균열을 닫겠다고 하지만 섣불리 나서는 건 위험했다. 게이브 제나이드가 균열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걸 안 이상, 앞으로 또 몇 번이나 균열이 생성될지 몰랐다. 그때마다 내가 정화해서 균열을 닫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 큰 피해가 생기기라도 하면 모든 비난의 화살은 균열을 닫지 못한 내게 쏠릴 게 분명했다.
우선은 사람들이 모두 대피할 때까지 버티고, 보는 눈이 없어진다면 그때 정화를 하든가 할 작정이었다. 그런 내 의도를 파악한 건지 레이안이 앞으로 나섰다.
우리를 잠자코 지켜보던 크룬델 공작도 마수를 향해 한 발짝 걸어갔다.
하지만 크룬델 공작은 현재 빈손이었다. 맨몸으로 어떻게 마수를 상대한단 말인가.
크룬델 공작이 제 손을 들어 보였다. 뭘 하나 싶어 멀거니 쳐다보자 이내 그의 손이 비틀리더니 마치 짐승의 발처럼 변화했다. 웬만하면 남들 앞에서 권능을 사용하지 않는 크룬델 공작이라, 소문으로만 듣던 변이의 권능이었다. 콰앙! 두 남자가 동시에 불길 속 마수들을 향해 돌진했다. 서로의 정체를 모르는 두 사람은 의외로 합이 괜찮았다. 콱! 크룬델 공작이 먼저 마수를 공격하며 시선을 돌리면. 서걱-. 그 틈을 타 레이안이 마수의 머리를 잘랐다. 비에탄의 권능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실력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잠깐 심호흡을 한 후 걸리적거리는 머리칼을 하나로 묶었다. 내게도 할 일이 있었다.
마수가 더 늘어나지 않도록 최대한 빨리 매개체를 찾아야 했다. *** 페르디아 공작의 집무실. 실베스터는 두 아들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해당 구획에는 경고를 주었어요. 또 같은 일이 발생하면 자격을 박탈하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얀시의 업무 보고가 이어지고 있을 그때, 규칙적인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선 부관이 실베스터에게 보고했다.
“가주. 현재 솜니아에 있는 4대 가문 혈족 전원에게 집합 황명이 내려졌습니다.”
“예. 이례적으로 도심 저택 한복판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도심 한복판에 균열이라니. 건국제 때 상공에 균열이 발생했던 것을 제외하면, 대개 균열은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에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솜니아 내에 발생했다면 균열의 크기가 크든 작든 4대 가문의 혈족들을 모두 소환한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얀시가 부관에게 물었다.
하암. 카를로트는 심드렁하게 앉아 하품하며 그들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중이었다. 부관이 덤덤하게 위치를 보고하던 그때였다.
덜커덩!
카를로트가 희게 질린 얼굴로 벌떡 일어나며 버럭 소리쳤다.
동생의 버릇 없는 행동에 얀시가 경고하듯 이름을 불렀지만, 카를로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엘로디의 이름에 실베스터와 얀시의 시선이 일제히 카를로트에게 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를로트는 이를 빠드득 갈며 외쳤다.

122화. 딸이라는 생물은 다 이런 것인가?
6–7 minutes

사람들이 모두 대피했다. 이곳에 남은 건 크룬델 공작과 레이안, 그리고 나뿐이었다. 불길이 치솟는 실내에서 움직이는 건 위험천만하다. 심지어 한쪽에서는 마수와 전투 중인 상황이라면 더더욱. 가면을 벗어던진 나는 손수건을 꺼내 근처에 있던 잔의 물을 붓고 그걸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몸을 한껏 낮추고 균열의 매개체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좀처럼 매개체로 보이는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그사이에도 나는 끊임없이 탐욕을 불렀다.
탐욕은 아까부터 계속 말이 없었다. 정확히 게이브 제나이드와 마주쳤을 때부터였다. 그 인간이 탐욕에게 무슨 수작이라도 부린 걸까. 하지만 내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휘익! 갑자기 날아든 테이블 파편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에.
주륵. 팔뚝에서 피가 흘렀다. 얇디얇은 드레스 옷감은 아무것도 보호해 줄 수 없었지만,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니었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레이안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옆에서 마수에게 팔을 휘두르던 크룬델 공작까지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마수가 공격을 감행하는 게 보였다.
크룬델 공작이 머리를 들이받는 마수의 뿔을 움켜쥐었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꼬치구이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나를 신경 쓰다가 두 사람이 위험해져선 안 된다. 단호하게 못 박은 나는 다시 매개체를 찾기 시작했다.
건국제 때는 검게 물든 제단이 ‘나 매개체요’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화하는 게 어렵지 않았지만, 지금은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크룬델 공작과 레이안이 마수와 전투하면서 실내는 실시간으로 풍비박산 진행 중이었다.
테이블 아래로 몸을 숙여 열심히 탐색하던 나는 문득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순간 벽에 붙어 있는 사슴 머리 장식과 눈이 마주쳤다. 반짝-.
아니, 아니다.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사슴 머리 장식의 한쪽 눈이 균열의 매개체였다. 장식의 한쪽 눈에서 미세하게 어떤 기운이 느껴졌으니까. 그토록 찾아 헤맸지만 발견할 수 없었던 이유가 높게 달려 있어서 그런 거라니. 장식의 눈을 정화하면 균열이 닫히고 더 이상 마수가 소환되지 않을 테지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내 손이 닿기에 벽 장식이 너무 높이 달려 있었다. 두 남자를 돌아보았지만 그들은 점점 불어나기만 하는 마수와 교전하느라 내게 신경 쓸 여유가 없어 보였다.
이곳 홀은 1층과 2층으로 되어 있는 복층 구조였다. 2층 난간에 매달려 손을 힘껏 뻗으면 사슴 머리 장식에 손이 닿을 것 같았다. 거의 반파되어 금방이라도 푹 꺼질 것 같은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서는 초토화된 현장과 마수들과 대치 중인 두 남자의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마수를 처치하는 것보다 균열을 통해 꾸역꾸역 나오는 수가 더 많아서인지 두 사람은 점점 열세에 몰리는 중이었다. 심지어 레이안은 크룬델 공작의 눈을 의식해서 권능도 쓰지 못해 더 힘에 부쳐 보였다. 쿵! 둔중하게 내리찍는 마수의 팔을 보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계획대로 난간에 매달린 나는 사슴 머리 장식을 향해 힘껏 손을 뻗었다. 예상했던 대로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했다.
난간을 붙잡고 있는 팔도 힘껏 뻗자 장식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드디어, 장식에 손끝이 닿았을 때였다. 콰아앙! 난데없이 건물이 뒤흔들렸다. 예고 없는 이변에 왼팔에 힘이 쭉 풀렸다. 그 순간에도 나는 사슴 머리 장식에 정화의 힘을 불어넣었다. 몸이 속절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날카로운 잔해가 훅, 가까워지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났음에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탄탄하고 단단한 무언가가…….
화들짝 놀라 눈을 뜨자 내 눈에 보인 건,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아주 익숙한 그 얼굴의 주인은 바로.
페르디아 공작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상황 파악하기도 전에, 우레 같은 외침이 내 귓전을 때렸다.
좀처럼 보기 힘든 페르디아 공작의 진심으로 화난 모습에 나는 직감했다.
*** 진입 전. 실베스터 페르디아와 두 아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황군이 화마에 살라 먹히는 마담 몽고메리의 저택을 포위한 후였다. 그 외 집합을 명령받은 다른 가문의 혈족들도 모두 모여 있었다. 두 황자도 도착하여 상황 파악 중이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저택에서 피신한 이들 사이로 엘로디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가면무도회였기에 하필 대부분 가면을 쓰고 있어서 한눈에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얀시는 눈으로 엘로디를 찾았지만, 카를로트는 그렇지 않았다.
카를로트는 거침없이 레이디들에게 가면을 벗으라고 종용하며 엘로디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엘로디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한 차례 훑어본 후 얀시와 카를로트가 실베스터 앞으로 돌아왔다. 얀시가 침착하게 보고했다.
“엘로디의 모습은 보이지 않네요. 카를, 네 정보 신뢰할 만하니?”
“확실해. 분명 누님이 마담 몽고메리 가면무도회에 간다고 했단 말이야!”
카를로트는 충격을 받았다. 엘로디라면 제게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슬퍼진 것이다. 그들이 엘로디의 행방에 대해 논의하고 있을 때, 한 레이디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저어, 레이디 페르디아는 잘 모르겠지만, 용병왕 이안은 봤어요.”
그녀의 제보에 팔짱을 끼고 관망하던 실베스터가 물었다.
“도망쳐 나오면서 봤는데, 용병왕만 가면을 안 쓰고 있었어요. 기사로 자주 본 얼굴이라 확실해요.”
용병 이안은 엘로디의 호위였다. 귀족은 아니지만 귀족들 사이에 얼굴이 제법 알려졌으니 영 신빙성 없는 제보는 아닐 것이다. 엘로디가 저택 안에 있을 수도 있다. 균열이 열린 데다 화재까지 난 저 위험천만한 저택 안에. 실베스터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저택 안에 진입하기 위해 걸음을 떼었다. 하지만 황군이 그 앞을 막아섰다.
“불길이 거셉니다, 각하. 이대로 진입하시면 위험합니다! 불길을 잡고 난 후에 진입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히익, 그는 실베스터의 형형한 눈과 마주하고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과연 페르디아의 수장, 풍기는 분위기에 그대로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실베스터를 저지하는 것을 포기한 황군이 앞장서 저택 안으로 진입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불길은 더욱 거세졌다. 이윽고 그들은 무도회가 열렸던 홀 앞에 도착했다. 피신하면서 마수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닫은 탓에 육중한 문은 굳건히 닫혀 있었다.
황군 하나가 문고리에 손을 댔다 뗐다 하며 실베스터의 혈압을 착실하게 올렸다.
결국 보다 못한 실베스터가 황군을 단호하게 밀어내고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문을 발로 찼다. 쾅! 엄청난 괴력에 순간 건물이 뒤흔들렸다. 공교롭게도 박살 난 문 너머로 보이는 건, 난간에서 떨어지는 딸의 모습이었다.
자신을 붙잡으려는 황군들을 떨쳐 내고, 실베스터는 가공할 속도로 달렸다. 휘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고, 그는 예리한 건물 잔해에 내리꽂힐 뻔한 딸을 받아 내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엘로디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후 조심스럽게 눈을 뜬 엘로디가 말간 눈을 깜빡였다.
어이가 없었다.
노성이 터져 나왔다. 눈 색은 또 왜 저런가. 아주 작정하고 이곳에 왔다는 증거에 실베스터는 치미는 화를 억눌렀다. 움찔, 몸을 움츠린 엘로디의 모습에 그는 침착함을 되찾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상대가 영 협조해 주지 않았다. 화난 그를 앞에 두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엘로디가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외쳤다.
저는 죽을뻔한 주제에 균열이 없어졌다며 환하게 웃고 있다니.
저 자그마한 머리로 무슨 앙큼한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얀시와 카를로트를 대할 때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막막함이었다.
실베스터는 혼란함을 느꼈다.

*** 균열이 닫힌 후로는 상황 정리가 빠르게 이루어졌다. 나머지 마수들은 4대 가문 혈족들의 손에 금방 정리되었고, 저택의 화재도 진화 작업이 시작되자 금세 불길이 잡혔다.
얀시가 제 겉옷을 벗어 내게 걸쳐 주었다. 드레스가 여기저기 찢겨 있어서 나는 얀시의 옷에 팔을 꿰었다.
거의 코트가 되어 버린 데다 소매가 길어서 손가락도 나오지 않았다. 괜히 소매를 팔랑거리고 있을 때였다. 여전히 화난 얼굴로 나만 내려다보던 페르디아 공작이 겉옷 소매를 접어 주기 시작했다.
놀라서 팔을 빼려고 했지만 페르디아 공작은 단호했다. 공작은 한쪽 소매를 다 접고 다른 쪽 소매까지 접은 후에야 만족스러운 듯 손을 거두었다. 그러는 사이 뺀질거리며 황군들에게 이런저런 명령을 내리던 2황자 벨트란이 크룬델 공작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상당히 놀랍군. 크룬델 공. 공께서도 이런 자리에 참석하시나 보오?”
은근히 비아냥거리는 벨트란의 물음에 크룬델 공작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너무 단호해서, 더는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없는 대답이었다.
헛기침한 벨트란은 민망한 듯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나를 쳐다보았다. 벨트란이 잘생긴 척하며 나에게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소름이 쫙 끼치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번 사건 조사는 내가 맡도록 하지. 공녀는 나와 함께 가 줘야겠어.”
저택에 있었던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닌데도 벨트란은 나를 지목했다. 나보다는 균열의 마수들과 직접 대치한 크룬델 공작과 레이안을 조사하는 게 옳을 텐데도. 당연히 페르디아 공작은 벨트란의 말에 불복했다.
“번거롭게 그럴 필요까지 있나, 페르디아 공. 조사를 마치면 곧바로 귀가할 수 있을 테니 잠자코 따르시오.”
그때 성가시다는 듯 물러나 있던 크룬델 공작이 내 앞을 막아섰다.
“공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마지막까지 이 장소에 있던 당사자로서 내가 조사에 동행하겠습니다.”
덩달아 레이안도 내 옆에 다가와 섰다. 번번이 제 의견이 묵살당하자 벨트란의 얼굴이 굳었다.
“공녀도 마지막까지 이곳에 있지 않았소? 이번 사건의 책임자로서 꼭 공녀를 데려가야-.”
그때였다.
화재 진압 중이던 아덴미르가 벨트란을 막아서며 말했다.
그 순간 분위기가 뭔가 이상해졌다. 특히 나를 보는 시선이 오묘했다. 나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남들이 볼 때는 아마 이렇게 보이겠지.
‘전약혼자, 현약혼자, 데이트했던 상대, 그리고 용병 정부……?’
팜므파탈이 따로 없었다.
123화. 설마 질투하시는 건 아닐 테고
5–7 minutes

아덴미르가 나서자 줄곧 책임자처럼 굴던 벨트란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아덴미르를 노려보았다.
“형님. 이 일은 제가 조사하겠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제가 하겠습니다. 형님께선 다른 쪽 수습을 맡으시죠.”
“조사 시작 전부터 마찰을 일으키는 너를 신뢰할 수 없다, 벨트란.”
“그건 페르디아 공이 공녀를 데려가면 안 된다고 하니까!”
욱해서 소리치는 벨트란에게서 시선을 뗀 아덴미르가 페르디아 공작을 돌아보았다.
“공. 이번 사건 조사를 위해 공녀를 데려가도 되겠나?”
공작이 대답하기도 전에 아덴미르가 한마디 더 덧붙였다.
“물론 크룬델 공과 용병 이안도 따로 조사받게 될 것이오.”
질문한 건 아덴미르인데, 페르디아 공작이 쳐다본 건 나였다. 마치 세계 최강의 사고뭉치를 보는 듯한 시선에 나는 으헤헤 하며 바보같이 웃었다. 공작이 한숨을 내쉬며 내게서 고개를 돌려 아덴미르를 보았다.
“적법한 절차를 통해 조사를 진행한다면 반대할 이유도 없겠지.”
결론이 아까와는 달라지자 벨트란이 더욱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쯧쯧. 저렇게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서 어떻게 큰사람이 되려고.’
아무리 생각해도 벨트란은 황제가 될 재목이 아니었다.
내게 눈짓하는 아덴미르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겉옷을 벗으려 하자 얀시가 말렸다.
만신창이가 된 옷을 그대로 드러내고 황성까지 가는 것도 체면이 아니니 얀시의 배려를 고맙게 받았다. 그런데 한 발짝 떼려는 순간 카를로트가 내 옷자락을 꽉 쥐었다.
또 시무룩해진 카를로트의 팔을 툭툭 두드린 후 다시 발을 떼려는데, 또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이번에 나를 부른 사람은 크룬델 공작이었다. 그는 옆에 있는 황군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는 내게 걸어왔다. 키가 큰 크룬델 공작이 바짝 다가와 고개를 기울였다.
작은 음성이 귓가를 간질였다. 너무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크룬델 공작의 얼굴이 멀어졌다. 그런 우리를 아덴미르가 매서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조사 전에 작당이라도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 아덴미르가 말했던 대로 나와 레이안 그리고 크룬델 공작은 분리되어 따로 움직였다. 나는 아덴미르의 마차를 타고 황성에 도착했다. 잠자코 아덴미르의 뒤를 졸졸 쫓아가는데 조사실로 가는 것 같지 않았다.
잠시 후 우리가 도착한 곳은 조사실이 아닌 응접실이었다.
바로 조사를 시작할 줄 알았지만 아덴미르가 먼저 한 건 황궁의를 불러오는 일이었다.
“깊게 베인 상처는 아닙니다. 제때 약만 잘 발라 주시면 금세 완치될 겁니다.”
황궁의는 내 팔뚝에 붕대를 칭칭 감고 약을 잘 발라야 한다며 거듭 당부한 후에야 물러갔다. 옆에서 치료하는 걸 내려다보고만 있던 아덴미르는 황궁의가 응접실을 나서자 내게 물었다.
순간 아덴미르가 손을 뻗어 엄지로 내 뺨을 쓸었다.
알게 모르게 날아든 건물 파편에 얼굴이 긁힌 모양이었다.
어쩐지 못마땅한 얼굴로 손을 떼어 낸 아덴미르가 맞은편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전부터 생각한 건데, 그대는 제 몸을 아낄 줄 모르나?”
아덴미르의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 눈이 잘못되기라도 한 건가. 아덴미르의 얼굴에 불만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 같은데. 잠깐 고민하던 나는 그에게 물었다.
화낸 적 없긴. 온몸으로 화내고 있으면서.
내가 아덴미르의 성난 표정을 흉내 내자 그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나의 안면 희생 덕분인지 분위기가 훨씬 누그러졌다. 덕분에 나도 다소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짜고짜 조사실로 데려가서 조사하는 게 아니라 응접실에 데려와서 치료도 해 주었다. 특혜라면 특혜였다. 페르디아 공작도 아덴미르를 믿었으니 나를 그냥 보내 준 걸 테고.
빨리 끝내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덴미르도 순순히 내 말에 응했다.
“마담 몽고메리의 저택 내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해 말해 주겠나?”
“가면무도회가 열려서 참석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 비명이 들리더니 균열이 열려 마수가 나타났죠. 운 나쁘게도 화재도 발생했어요. 하필 제가 그곳에 있었고, 전에도 닫아 본 적 있으니까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게 전부예요.”
일부러 게이브 제나이드를 만났던 이야기를 제외했다. 발코니에 있을 때 그자가 나타난 거라 우리가 함께 있었다는 걸 증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섣불리 이야기했다가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이 질문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괜히 거짓말을 했다가 탄로 날 수 있으니 사실대로 대답했다.
호위가 호위 대상 근처에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모든 질문에 사실대로 이야기했건만, 아덴미르는 뭔가 할 말이 있는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덴미르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테이블 아래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내가 그런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던 이유는, 1황자의 약혼녀로서 명예를 깎아내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혹시나 다른 가문의 파티에 참석했다가 사고라도 칠까 봐 공식 행사에만 참여했다. 아예 선택지도 없었으니 좋아하고 싫어할 기회도 얻지 못했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행동하게 된 원인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단정하니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래서인지 약간의 오기가 생겼다. 나는 아덴미르를 보며 활짝 미소 지었다.
아덴미르가 뭔가 복잡한 감정이 서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의미인지는 짐작할 수 없지만, 상대의 감정에 동요를 일으켰다는 것만으로 만족스러웠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아덴미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런 자리에 잘 모르는 사내와 함께 참석하는 건 남들 입에 오르내리기 좋으니 조심하는 게 좋겠어.”
조언처럼 말하고 있지만 내게는 쓸데없는 참견으로 들렸다.
또다시 침묵하는 아덴미르를 보며 장난처럼 한마디 툭 내뱉었다.
질투라니. 내가 한 말이지만, 참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 . . 형식적인 조사를 끝내고 엘로디를 자택에 귀가시키는 과정 동안 아덴미르는 줄곧 얼이 빠져 있었다.
그 말이 쉴 새 없이 귓가를 맴돌았다.
실없이 웃음이 나오다가도 돌연 얼굴을 굳혔다. 그냥 전 약혼녀가 괜한 추문에 시달리는 게 신경 쓰일 뿐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전 약혼녀였으니까. 그러다가도 크룬델 공작과 용병 이안의 관심을 받던 엘로디의 모습이 계속 생각났다. 그런데 아까 친밀한 듯 엘로디에게 다가가 무어라 귓속말하는 크룬델 공작의 모습을 보고 짜증이 일었던 건 왜지.
또 빌어먹을 엘로디의 고운 음성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 아니야. 그렇게 부정하던 아덴미르는 돌연 얼굴을 붉히며 한 손으로 입가를 틀어막았다.

그것도 파혼한 전 약혼녀를 상대로 질투한다고? 자각의 순간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 장소는 페르디아 공작의 집무실. 나는 지금 엘로디로서의 인생을 살아가며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수치스러운 순간을 겪고 있었다. 쭈뼛. 꼼질꼼질……. 좀이 쑤셔 몸을 좀 꿈틀거렸을 뿐인데, 날 선 음성이 들려왔다.
번쩍! 나는 얼른 몸을 바로 하고 손을 번쩍 들었다. 그랬다. 나는 지금 벌을 받고 있었다. 그것도 어린아이들이나 받는 체벌인 ‘무릎 꿇고 손들고 있기’를! 다 큰 귀족가의 레이디가 이런 벌을 받는 걸 알면 얼마나 비웃을지 감히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우스운 건 한쪽 팔은 다쳤다는 이유로 올리지 말고 꼼짝하지 말라는 페르디아 공작의 당부였다. 병 주고 약 주고 난리다. 하나만 하셨으면 좋겠는데……. 슬그머니 공작의 눈치를 살피던 내가 잔뜩 시무룩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그런 문란한 파티에 참석했다고 벌을 주는 게 아니다. 그 이유를 스스로 알고 반성할 때까지 손 들고 있거라.”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것 때문이 아니라면 도대체 이유가 뭔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최선을 다해 반성하고 싶지만 원인을 알 수 없으니 불가능했다. 다시 뻐근한 팔을 꼼질거리며 페르디아 공작을 힐긋힐긋 쳐다보기만 하자 공작이 한숨을 내쉬며 깃펜을 내려놓았다.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그 즉시 나왔어야 했다. 한데 너는 그러지 않았지.”
“하지만 일이 커지기 전에 수습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결과적으로는 잘 해결되었고요.”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도심 한복판에 생겨난 균열 탓에 많은 인명피해가 생겼을지도 몰랐다. 비약이긴 하지만 사태가 더 커졌을 때 건국제 때 균열을 닫았던 나를 언급하며 탓하는 무리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러니 나는 최선의 행동을 했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페르디아 공작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네게는 스스로 몸을 지킬 아무 수단도 없지 않으냐.”
미미하게 찡그린 페르디아의 눈길이 스친 곳은 붕대가 감겨 있는 팔뚝이었다. 다행히 깊게 베이진 않았지만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자면 자칫 큰 부상을 입었을 수도 있었다. 그렇구나. 공작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나긋한 발걸음으로 공작 부인이 안에 들어섰다.
나를 발견한 부인이 놀란 듯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쭈굴……. 그저 수치스러운 나는 집무실의 인테리어가 되어 잔뜩 움츠렸다. 부인이 페르디아 공작을 향해 다가가며 물었다.
그러자 공작 부인이 기가 찬다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무릎을 꿇리는 벌을 주시려거든 푹신한 깔개라도 대 주셨어야죠.”
당황한 건 나였다.
그런데 어이없는 건 잔뜩 흔들리는 눈으로 내 무릎 부근을 바라보는 공작의 시선이었다.
잠시 후, 나는 부드러운 융단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거 맞나요?
124화. 부부싸움에 엘로디 등 터진다
5–7 minutes
머쓱해진 나를 병풍으로 두고, 페르디아 부부의 대화가 이어졌다.
“위험한 상황에도 나오지 않았던 무모함을 반성하길 바랐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엘로디가 잘하기라도 했다는 뜻인가? 마수가 들끓는, 불타는 저택에 남아 있는 것이?”
대화가 끊겼다. 두 사람은 잡아먹을 듯 공격적인 시선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이내 부인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으응? 갑자기 제 욕을? 물론 난데없이 욕을 먹은 내가 황당해해서는 아니겠지만, 부인은 다른 표현으로 고쳐 말했다.
그러나 페르디아 공작은 부인이 고쳐 말한 보람도 없이 내가 고집 세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내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런 리리의 선택이라면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왜 그랬는지 들어주지는 못할망정 다짜고짜 벌을 주시나요?”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을 때 또 무모하게 행동하면 안 되니까.”
“글쎄요. 전 잘 모르겠네요. 리리가 당신 뜻대로 행동할지. 아마 저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움직일 것 같은데…….”
말꼬리를 흐리던 공작 부인이 벌서고 있는 나를 흘긋 쳐다보며 고혹적으로 미소 짓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딸꾹! 갑자기 부인이 민감한 이야기를 꺼내어 놀라서 그런 건지 난데없이 딸꾹질이 시작되었다. 부인과 페르디아 공작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닿았다. 나는 최대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웃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내 바람대로 나에게서 신경을 끄고 다시 서로를 노려보며 대화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싫은 주제만 나오면 상습적으로 입막음하려고 드시니 리리가 각하를 어려워하는 거예요.”
딸꾹! 눈치 없는 딸꾹질 같으니라고. 다행히 이번에는 두 사람 모두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페르디아 공작이 성가시다는 듯 혀를 차며 짧게 경고했다.
“어차피 리리도 다 아는데 그만 피하세요, 각하. 언제까지 회피하기만 하면 마음이 편하신가요?”
“목소리 깔고 이름 부르면 제가 무서워할 줄 아셨나요?”
부인이 노골적으로 페르디아 공작을 비웃었다. 공작의 금빛 눈동자에 못마땅한 기색이 짙어졌다.
부인이 방긋 웃자 페르디아 공작이 팔짱을 끼고는 그녀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덜덜……. 여전히 그 사이에 있는 나는 벌서는 그대로 공포에 떨었다.
“왜 이렇게 이름을 부르신담? 네, 위대하신 실베스터 페르디아 공작 각하. 말씀하세요.”
그렇게 시작된 부부싸움. 딸꾹…….
제발 나는 빼고 싸워 주셨으면 좋겠다.

*** 부부싸움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페르디아 공작이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골이 아프기라도 한 듯싶었다. 그럴 만도 하지. 무슨 말만 하면 부인이 비웃으며 반박했으니까. 나는 살 떨려서 숨도 최대한 작게 쉬었다.
공작의 축객령에 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려는 걸 겨우 참았다.
나는 얼른 팔을 내리고 냅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푹신한 융단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고 한들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있었으니 팔다리가 저릴 수밖에 없었다. 나도 모르게 비틀거리자 페르디아 공작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내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공작이 다가오기도 전에 나는 얼른 균형을 잡았다. 그러자 공작이 손을 거두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만하고 나가자, 리리. 저런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과는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단다.”
부인이 나를 문밖으로 끌어당겼다.
쾅! 문이 거세게 닫히며 부인을 부르는 페르디아 공작의 목소리가 뚝 잘렸다. 이렇게 나가도 괜찮은 걸까. 페르디아 공작, 엄청 화난 것 같은데. 굳게 닫힌 문을 보며 안절부절못하는데, 부인이 나를 불렀다.
나는 냅다 부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부인이 조금 더 세 보이니까 일단 부인 편에 붙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페르디아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공작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부인이었다는 엄청난 진실을 알고 말았다. 아까까지는 팔다리에 쥐가 나 고통스러웠지만, 복도를 걷다 보니 점점 나아졌다. 그렇게 나란히 걷고 있을 때, 부인이 불쑥 질문했다.
“사실…… 저번에 히클마이어 백작 초대로 갔을 때 얼굴을 봤어요.”
내 말이 의외였던지 부인이 오묘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공작 부인은 뭔가 생각하는 듯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또각또각. 타박타박. 한동안 우리의 발소리만 복도에 울렸다. 내가 공작 부인을 힐끔힐끔 쳐다보자, 부인이 매혹적으로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계속 훔쳐보고 있던 걸 걸렸다는 생각에 뺨이 붉어졌다. 나는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하고 싶었던 말을 건넸다.
“오늘 이렇게 오셔서 제 편 들어 주신 거요. 사실 그전에도 제 편 들어 주실 때마다 감사했어요.”
내가 부인에게 먼저 다가갔던 그 날을 계기로, 부인은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내 편을 들어 주었다. 삭막하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페르디아에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는 건 큰 위안이었다. 고개를 기울여 나를 가만히 쳐다보던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예를 들면…… 시커멓고 커다란 아들 녀석이 아닌 딸?”
뜻밖의 말에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부인의 기다란 손가락이 흐트러진 내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겨 주었다.
“내가 너의 엄마가 되어 줄 순 없겠지만, 의지할 수 있는 존재는 되어 주고 싶구나.”
어느새 내 침실 앞이었다. ***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나는 고단한 몸을 이끌고 겨우 목욕을 마치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침대에 대자로 누우니 좀 살 것 같았다.
난데없이 들려오는 한숨 소리에 나는 얼른 옷 속에서 봉인석을 꺼내어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아까부터 계속 말 없어서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잤다는 죄악치고는 뭔가 목소리가 피곤한 듯 들렸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나는 봉인석을 붙들고 탐욕을 불러내었다.
툭. 침대 아래 바닥에 발을 디딘 탐욕의 귀와 꼬리가 축 처져 있었다. 평소에는 얄밉기만 하더니 이렇게 처져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안 좋았다.
침대에 앉아 무릎 위를 툭툭 두드리자 탐욕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나는 영 기운 없는 탐욕을 요리조리 살폈다. 네 다리도 들었다가 내려놓고, 귀도 들었다가 내려놓고, 코도 툭툭 만져 보자 탐욕이 귀찮다는 듯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게이브 제나이드 그 인간이 너한테 무슨 짓 한 건 아니지?”
아니라고 하는데도 묘하게 기운 없는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배는 안 고파? 나 오랜만에 보석 카탈로그 좀 읽어?”
여우도 열이 나나. 괜히 이마에 손을 얹고 열을 재며 부산을 떨었다. 탐욕의 금색 눈동자가 그런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탐욕이 과거 세상을 멸망으로 몰고 갔던 7대 죄악 중 하나라는 사실은 잘 알았다. 귀여운 외모와 달리 신 이르칼라의 창조물로 언제든 나를 해칠 수 있다는 것도. 하지만 거의 매일 24시간 붙어 있는데 정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죄악이라고 해도 아프다는데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마음을 주지 말라는 레이안의 경고를 반쯤은 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를 계속 빤히 보던 탐욕이 또다시 귀를 축 늘어뜨렸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사춘기가 지금 왔나. 나는 내 무릎 위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눈을 감아 버린 탐욕의 머리를 살살 긁어 주었다. 계속 잤다면서도 탐욕은 금세 곯아떨어졌다. 그때 잠잠하던 통신 마도구에 반응이 왔다. 낯선 코드를 보며 갸웃하던 난 상대가 누군지 금세 눈치챘다. 얼른 통신을 연결하자 담담하고 단정한 음성이 들려왔다.
“엘로디예요. 안 헷갈리고 잘하셨네요? 어때요, 쉽죠?”
무덤덤한 목소리로 공치사하는 모순에 어쩐지 웃음이 터졌다.
“각하께서 그렇게 타인을 띄워 주실 만한 분이 아닐 걸 잘 아니까요.”
원작으로 크룬델 공작의 성격을 대강이나마 알고 있던 탓에 나도 모르게 친한 척해 버렸다. 겨우 좋게 만든 크룬델 공작과의 관계가 악화되면 곤란했기에 나는 얼른 사과했다.
공과 사를 구별하는 게 좋겠지. 내가 선을 긋자 공작은 더는 그 주제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까 다친 건 괜찮습니까? 계속 신경 쓰였습니다.]
“네. 1황자 전하께서 바로 치료해 주셨어요. 조사 때 별일 없으셨죠?”
크룬델 공작도 나와 마찬가지로 몇 가지 질문만 하고 금세 풀려난 모양이었다.
크룬델 공작과 통신을 종료하면 바로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크룬델 공작이 나를 불렀다.
[아니요. 발코니에서 함께 있었던 남자를 말하는 겁니다.]
발코니에 함께 있었던 남자라면 게이브 제나이드였다. 아무도 그자와 내가 함께 있는 걸 못 봤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이윽고 크룬델 공작이 내게 물었다.
어째선지 공격적인 음성이었다.

125화. 이름으로 불러도 되나요?
5–6 minutes
어두운 발코니였던 데다가 상대방은 검은색 가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을 분간하기 어려웠을 텐데. 마치 누구인지 알아본 것처럼.
언제 날 선 목소리로 질문했냐는 듯 크룬델 공작은 다시 침착하고 정중한 음성으로 내게 물었다.
[공녀의 말을 믿지 않은 건 아닙니다. 오해했다면 죄송합니다.]
내가 기분 나쁜 티를 낸 것도 아닌데, 크룬델 공작은 조심스럽게 사과했다.
[어쩌면 그자가 동생의 실종과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건국제 때의 균열 사태도, 그리고 이번 마담 몽고메리 파티 때의 균열에도 게이브 제나이드가 관련 있을 거라 생각하는 지금, 크룬델 공작의 추측은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균열의 원인이 게이브 제나이드가 맞다면, 크룬델 공작의 동생을 납치한 것도 게이브 제나이드일 수 있었다.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크룬델 공작은 동생과 부모님을 화재 사건으로 잃었다고 들었다. 4대 가문 중 하나를 제거하는 건 아무래도 이르칼라에게 유리한 상황이니 배제할 수 없었다.
‘크룬델 공작의 동생을 죽이지 않고 납치한 이유는 뭘까?’
또 이해되지 않는 점이 하나 있었다.
발코니에서 게이브 제나이드가 했던, 이르칼라가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경고. 게이브가 이르칼라의 뜻대로 움직이는 이르칼라 교단 중 하나라면 나에게 아무 정보도 주지 않는 편이 좋을 테니까. 하지만 크룬델 공작이 말을 걸면서 내 고민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불안해졌다. 급작스레 균열이 나타나는 바람에 확답을 듣지 못한 채로 만남이 끝나지 않았나.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물었다.
혹시나 실마리를 잡았으니까 이대로 거래는 끝이라고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역시 기우였다.
죄악과 거래했다는 사실만 빼면 정의, 원리, 원칙 그 자체인 사람이 아니던가.
[공녀가 알려 준 대로 그자를 중점적으로 조사해 보려고 합니다. 남마탑의 동태를 살피는 것부터 시작해야겠군요.]
“앙겔로스 저택에서 주로 지내는 것으로 알아요. 도로테아 양의 스승이거든요.”
그건 정보원이 아니라 내가 보고 겪은 거지만, 설명하기 귀찮으니 그렇다고 해 두자.
[공녀가 내게 필요로 하는 게 나태의 능력뿐이라는 건 알지만, 그 외에도 개인적으로 부탁할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거래와는 별개로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돕겠습니다.]
웬일인지 크룬델 공작이 내게 호의를 가진 것 같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크룬델 공작에게 좋은 모습을 보인 걸까? 지난 사건들을 곰곰이 되짚어 보던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상대방의 감정이야 어찌 되었든 연줄은 만들어 두면 좋다. 특히 4대 가문의 가주의 호의라니, 더 좋았다. 나는 싱긋 웃으며 통신 마도구를 내려다보았다.
내 부탁이 갑작스러웠는지 크룬델 공작의 대답은 한참 후에 돌아왔다.
“이래 봬도 협력 관계인데 딱딱하게 각하, 공녀 이렇게 부르는 게 삭막하고 그러네요. 물론 각하도 제 이름 부르셔도 돼요!”
내가 너무 갑자기 친한 척해서 부담스러운 걸까? 괜히 성급하게 굴었다가 기껏 얻은 긍정적인 관계를 그르칠까 봐 바로 한발 뒤로 물러났지만, 크룬델 공작은 관대했다.
먼저 내 이름을 부른 건 허락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혹시나 크룬델 공작이 말을 바꿀까 봐 얼른 대답했다.
이름을 허락받았다는 감동도 잠시.
일밖에 모르는 청년의 말에 나는 시무룩하게 입꼬리를 내렸다.
[공녀, 아니, 엘로디 양은 혼수상태인 누군가를 깨우기 위해 나태의 힘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태에게 직접 가능한 일인지 확인해 봤지만, 자신은 꿈속에 들어가게 할 수는 있어도 꿈에서 깨우는 재주가 없다고 답했습니다.]
그 말은, 나태의 능력으로 혼수상태인 사람을 깨울 수 없다는 뜻인가? 하지만 분명 신 이슈타르는 나에게 말했다.
다섯 번째 아이는, 일곱 영웅의 후예인 레온 크룬델이고, 꿈은 크룬델 가문이 봉인 중인 나태인 게 분명했다. 명색이 신인데, 허튼 말을 하지는 않았을 터.
한가지 가정이 떠오르자 나는 바로 질문을 던졌다.
“레온 님. 혹시 제가 직접 나태의 힘을 쓸 수 있을까요?”
내 정화의 권능이 친아빠를 깨우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될지도 모른다는 강한 직감이 들었다. 잠깐의 침묵 후 크룬델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태에게 물어보니 죄악의 힘은 계약자만 쓸 수 있다고 합니다.]
영악한 죄악이 거짓말하는 건 아닐까. 그런 내 의문은 금세 해소되었다.
자는 줄 알았던 탐욕이 대신 대답해 주었다. 두 죄악이 입 모아 말하니 일개 인간인 나로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허탈했다. 크룬델 공작만 회유하면 바로 친아빠를 깨울 수 있을 거라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에. 하지만 절망할 새도 없었다.
[계약을 해지하면 되겠지만, 내게는 아직 죄악의 힘이 필요합니다.]
이번에도 답은 명확했다.
“그럼 하루라도 빨리 동생 분을 찾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야겠네요.”

*** 어떻게 해야 크룬델 공작이 게이브 제나이드의 얼굴을 자연스럽게 확인할 수 있을까? 그 답은 마리오가 명쾌하게 알아 왔다.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자 마리오가 큭큭 나를 비웃으며 대답했다.
[네. 아가씨는 단 한 번도 참석한 적 없는 마수 토벌전이요.]
[아가씨만 그렇게 질색하죠. 다른 영애들은 무조건 참석하는데요?]
그거야 마수 토벌전에 참석하는 잘생긴 남자들 구경하려고 그러는 거지. 애초에 나는 1황자의 약혼녀였으니 다른 잘생긴 남자를 구경할 이유도 없었고, 무엇보다 활동적인 행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웬만하면 실내 행사가 좋았다.
[아가씨는 한 번도 참석한 적 없어서 모르겠지만, 마수 토벌전에는 사방위 마탑주들 전원 의무 참석이랍니다.]
하필 내가 내내 건강 핑계로 불참했던 마수 토벌전에 게이브 제나이드가 올 예정이라니. 마법사들은 워낙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데다 마탑마다 성향이 달랐다. 그중에서 특히 남마탑주 게이브 제나이드는 두문불출하기로 유명했다. 거처가 불분명해서 개인적으로 관찰하거나 만나는 게 쉽지 않은 인물이기도 했다. 많지는 않지만 나름 공식 행사에 참여했던 나만 해도 예전에 레스토랑에서 게이브 제나이드를 보았을 때 마탑주인 줄 알아보지 못했으니까.
[그럼 저는 이만 단장이 시킨 일을 하러 가 보겠습니다.]
[뭘용. 다 받은 대로 하는 거죠. 그럼 진짜 이만-.]
마리오와의 통신을 종료하자마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수를 때려잡는 걸 하염없이 기다리는 마수 토벌전에 가고 싶을 리가. 마수 토벌전. 소위 보여 주기용 이벤트로, 중형 마수 출몰지에 캠프를 차려 귀족 가문들의 뛰어난 무위를 가진 자들이 마수를 토벌하는 행사였다. 황실에서 마수 개체가 늘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생색내는 행사라 할 수 있었다. 대개 다른 나라에서 진행되는 사냥대회의 목표물이 짐승에서 마수로 바뀐 것이라 보면 됐다. 가장 많은 마수를 잡은 자에게는 황제가 포상을 내리기까지 했다.
특히 마수 토벌전은 공식 행사 중에서 카를로트가 제일 좋아하는 행사였다. 야외에서 지반 붕괴의 권능을 마음껏 펼치는 바람에 ‘파괴 신’이라 불린다는 소문을 들은 적도 있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어기적어기적 걷기 시작했다. 페르디아 공작의 허락을 받기 위해서였다. 각 가문의 가주가 일원 중 참석자 명단을 황실에 제출해야 참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내 공작의 집무실 앞에 도착한 나는 내가 노크하기도 전에 열리는 문에 깜짝 놀랐다.
슬쩍 들어가자 공작이 소파에 앉았다.
슬그머니 맞은편에 앉은 나는 곧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금빛 눈동자가 의구심을 가지고 나를 쳐다보았다.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최근에 마수들을 가까이서 많이 봤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마수들을 맞닥뜨렸을 때 잘 대처할 수 있을지 다른 사람들이 토벌하는 걸 보면서 배우면 어떨까 싶은데요.”
나는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어이없는 건 점차 누그러지는 페르디아 공작의 눈빛이었다.
이렇게 쉽게 허락을 얻어 내다니, 오늘은 운수가 제법 좋았다. 하지만 그건 성급한 판단이었다.
조건을 참 좋아하는 페르디아 공작답게,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내가 질문하는 그 순간, 똑똑, 문밖에서 누군가 노크했다.
이윽고 안으로 들어선 건 얀시였다. 내가 있는 줄 몰랐던 얀시가 잠깐 나에게 시선을 주더니 환하게 미소 지었다.
“마침 잘 왔다, 얀시. 네가 이번에 마수 토벌전에서 엘로디 옆에 붙어서 잘 지키거라.”
권유도 아닌 명령이었다. 예전에 내게 제안했던 것처럼 카를로트나 얀시의 선택권도 없었다.
순순히 명령을 따르는 얀시를 보며 나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얀시라면 나를 잘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126화. 말 잘 들을게
5–7 minutes
“그래. 그 건은 얀시 네 말대로 처리하도록 하고. 이만 나가 보거라.”
얀시의 보고가 끝난 후 우리는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얀시의 침실은 내 침실과 반대 방향인데도 그는 나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페르디아 공작이랑 일 얘기하는 거 보면 할 일이 많은 것 같은데.
“사랑하는 동생 침실에 데려다줄 시간은 있어. 아, 진심이니까 부디 오해하지 마.”
왜 얀시가 말하면 다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을까. 어린애도 아니고 굳이 데려다줄 필요는 없지만, 얀시에게 용건이 있기도 해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나란히 복도를 걷다가, 얀시를 흘끔 보았다.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건지 얀시가 부드럽게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며 대수롭지 않은 척 물었다.
“그냥, 요새 오라버니 권능 제어는 좀 어떤가 하고요.”
얀시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게 일부러 정면을 보고 있음에도 여실히 느껴졌다.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얀시가 침묵을 깼다.
얀시답지 않게 씁쓸한 어조였다.
그런 상태에서도 남들에게 티를 내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일상생활을 하는 얀시는 대단했다. 엄청난 정신력이라고 해야 할지. 너무 강대한 권능이 무조건 좋지만은 않다는 증거가 바로 얀시 페르디아였다. 문득 나는 우뚝, 멈춰 섰다. 그러자 한 걸음 먼저 간 얀시가 따라 걸음을 멈추며 나를 돌아보았다.
내 뜬금없는 요구에도 얀시는 의도를 묻지 않고 바로 내 손 위에 턱, 제 손을 올렸다. 저항 없이 내맡기는 얀시의 커다란 손을 보며 왠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언제 나를 공격할지 모르는 맹수의 앞발을 쥔다면 이런 기분일까. 얀시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후계자로서 가주의 일을 돕는 사이에서도 틈틈이 육체단련도 소홀히 하지 않아서인지 커다란 손은 단단했다. 나는 언제나 끼고 다니는 얀시의 장갑을 벗기고 맨손을 덥석 붙잡았다.
다소 멍한 눈으로 붙잡힌 제 손을 내려다보면서 얀시가 입술을 달싹였다.
좋다고?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얀시는 뭐가 이상하냐는 듯 빙그레 웃으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닿는 것만으로 권능 제어가 쉬워지네. 역시 리리 권능 영향인 것 같아.”
내가 손을 치우자 얀시가 마음에 안 드는 듯 미간을 살짝 좁혔다.
“떼도 어느 정도 효과는 남아 있는 것 같아. ……오래가지는 않겠지만.”
얀시의 손끝이 내 손등을 툭 건드렸다. 어쩐지 은근히 바라는 듯한 눈치라, 나는 선심 쓰듯 얀시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얀시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극명한 표정 변화로 얼마나 내 권능이 얀시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었다. 그건 내가 바라는 바였다.
“이번에 마수 토벌전에서, 내가 하는 일 방해하지 마세요. 아버지에게 이르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약속 지켜 주시면, 또 손잡아 드릴 테니까요.”
그러자 얀시가 순종적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페르디아 공작이 간과한 그건 바로-.
내가 얀시 페르디아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것이다.

*** 어느덧 여름의 초입이었다. 햇빛 아래 바람이 불면 시원하고, 그늘에 서면 가끔 서늘한 정도의 날씨. 한결 가벼워진 옷차림으로 페르디아가의 마차 앞에 섰다. 새벽이라 그런지 아직 주위가 어둑어둑했다. 카를로트가 말고삐를 쥐고 마차 앞쪽에서 대기 중인 레이안을 불만스럽게 흘겨보며 물었다.
카를로트는 어쩔 수 없다면서도 서운한지 괜히 툴툴거리듯 말했다. 나는 그 투정을 가볍게 무시하며 마차에 올랐다. 얀시와 카를로트까지 마차 안에 착석하자, 마부가 말을 몰기 시작했다. 오늘은 대망의 마수 토벌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이번에 마수 토벌전 장소로 결정된 곳은 수도 솜니아에서 마차로 6시간 꼬박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중형 마수 출몰지였다. 지형은 제법 산세가 험한 산맥 한 군데로, 딱 상업 요충지인 영지와 영지를 가로막고 있는 위치였다. 평소 마수가 출몰해서 주변 마을을 습격하는 바람에 토벌 요청이 자주 들어오는 곳이기도 했다.
싱글벙글 웃는 카를로트를 보며 나는 왜 그곳이 이번 마수 토벌전 장소로 선정되었는지 추측했다. 그 산맥, 뚫어 놓으면 경제적 이익이 상당하겠지.
자신이 이용당하는지도 모르는 채 카를로트는 자신만만하게 호언장담할 뿐이었다. 얀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카를로트를 보며 말없이 미소 지었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다. 나와 얀시는 마수 토벌전에 출전하지 않고 참관객으로 참가했다. 페르디아 공작 부부는 애초에 나와 마찬가지로 마수 토벌전 같은 행사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불참이었다. 그리하여 페르디아 가문에서 오늘 마수 토벌전에 참가하는 인원은 세 명의 자식들이었다. 한창 마차 창문 밖을 바라보며 휙휙 바뀌는 풍경을 구경하는 것도 지쳤다. 지루한 여행길에 나도 모르게 꾸벅 고개가 앞으로 꺾였다. 잠결에 내 옆에 앉은 얀시가 뺨을 감싸 나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는 게 느껴졌다. 툭, 고개가 얀시의 어깨에 닿았다.
얀시의 배려를 거절하기에는 몰려드는 수마가 너무도 강렬했다. 나는 순식간에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소곤소곤. 한껏 낮춰 대화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형만 무릎베개해 주고. 치사해. 이런 법이 어디 있어.”
도대체 이게 무슨 대화란 말인가.
아직도 꿈속인가 싶었지만, 현실 감각이 너무도 선명했다. 당황하며 눈을 뜬 나는 곧바로 얀시의 푸른 눈동자와 마주쳤다.
얀시가 다정하게 바라보며 내게 물었다. 분명 얀시의 어깨에 기대 잠들었던 것 같은데, 나는 얀시의 무릎을 베고 마차에 누워 있었다. 부스스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은 나는 어쩐지 아쉬운 듯 나를 바라보는 얀시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누워 잤더니 온몸이 뻐근한 것 외에는 다 괜찮았다. 푹 자고 일어나서인지 개운한 느낌까지 들었다.
솔깃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탓일까, 카를로트가 불쑥 끼어들어 자신의 무릎을 어필했다.
카를로트가 제 허벅지를 팡팡 두드리며 활기차게 외쳤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카를 네 허벅지는 근육 때문에 딱딱할 것 같아서 싫어.”
카를로트가 충격받은 얼굴로 제 허벅지를 내려보았다. 그러더니 정말 큰 결심을 한 듯 주먹을 꽉 쥐었다.
“크윽. 누님이 바란다면, 하체 운동은…… 생략하도록…… 해 볼게…….”
훈련 바보답게, 정말로 큰 결심이었다. 저러다 정말로 하체 운동을 생략할지도 모른다.
내 대답에 카를로트의 표정이 도로 환해졌다.
*** 새벽부터 출발해, 목적지까지 장장 6시간을 달려 도착하니 시간은 어느새 정오였다. 마차에서 내린 나는 뻐근한 몸을 풀어 준 후 곧바로 레이안을 찾아갔다. 말에게 물을 먹이던 레이안이 나를 돌아보았다.
호위 명목으로 레이안이 동행하긴 했지만, 오늘의 목적은 게이브 제나이드였다. 때마침 멀찍이 크룬델 가문의 마차가 멈춰 서더니 레온이 내리는 게 보였다. 나는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행여 눈이라도 마주치기 전 관심 없는 척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런 크룬델 공작과 우리를 바라보는 묘한 시선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필수 참석해야 하는 공식 행사를 제외하고는 저택에서 잘 나오지 않는 크룬델 공작과 처음으로 마수 토벌전에 참관하게 된 나. 호사가들이 떠들기 딱 좋은 주제이긴 했다. 그럴수록 우리는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기로 미리 말을 맞춰 놓은 후였다.
“누님. 나 올라가서 준비해야 해. 응원 많이 해 줘야 한다?”
대충 대꾸해 줬을 뿐인데, 카를로트는 바라던 대답을 들은 사람처럼 팔랑팔랑 신나게 뛰어갔다. 평소보다 더 흥분한 모습을 보니 왠지 사고를 칠 것 같아 불안했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닌지 얀시도 카를로트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참가 인원도 있고, 마수 토벌전 준비로 주변은 상당히 수선했다. 4방위의 마탑주들은 마수 토벌전 시작 직전에 착석하기에 게이브 제나이드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토벌전이라지만 결국 이 행사도 사교의 장이기에 곳곳에서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중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얀시와 자주 어울리는 무리가 얀시를 힐끔 쳐다보았다.
“다들 오라버니와 대화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잠깐 정도는 자리 비워도 돼요.”
“아냐, 괜찮아. 오늘 내 임무는 리리 너를 지키는 거잖아.”
얀시는 오늘만큼은 그들과 어울리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태도였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나도 더 권할 생각은 없었다. 문득 주변을 살피던 나는 근처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이었다. 도로테아는 늘 그렇듯 한 겹 가면을 쓴 얼굴로 싱긋 웃어 보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웬일인지 오늘은 내게 시비를 걸지 않을 작정인 듯했다.
운 좋게도 오늘은 평화롭게 넘어가나 생각할 바로 그때였다.
“오랜만에 뵈어요, 얀시 님. 엘로디 양도 잘 지내셨나요?”
귀에 착 감기듯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누군가 우리에게 인사했다. 고개를 돌리자 보인 것은 마치 백합처럼 고아한 분위기의 여인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 레이디를 이렇게 칭하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얀시 페르디아에게는 아직 약혼녀가 없었다. 페르디아 공작 부부도 당사자가 원하지 않으니 약혼을 추진한 적 없었다. 그런데도 훗날 페르디아의 공작 부인이 될 것이라면, 분명히 이 레이디일 것이라 입 모아 말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내 눈앞에 서 있는 유테르 후작가의 레이디인 히아신스 유테르였다.
“오랜만에 뵈어요, 히아신스 양. 최근에 못 뵈었는데 외국에 다녀오셨다고요.”
“네. 얼마 전에 입국했답니다. 얀시 님께서 보낸 편지가 외국 생활에 큰 힘이 되었어요.”
뭐야, 뭐야. 편지도 주고받고……?! 역시 제일 재미있는 건 남의 연애인 법. 나는 얀시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127화. 산맥 파괴범의 배후
6–8 minutes

오라버니의 연애 사업을 위해 자리를 피해 주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얀시가 나를 불렀기 때문에. 못 들은 척 슬그머니 가려고 하자, 기어코 얀시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가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자, 성큼 다가온 얀시가 스스럼없이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누군가와 닿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얀시가, 이렇듯 친밀함을 표현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실수로 권능을 제어하지 못해 누군가를 해칠까 봐 스스로 몸을 사리는 것이지만, 그건 나와 얀시만 아는 비밀이었다. 그런 속사정까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얀시가 선뜻 친밀하게 스킨십하지 않는다는 건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래서 얀시는 파트너도 잘 두지 않았다. 에스코트하는 것도, 춤추는 것도 다 꺼리기 때문이지만 속내를 모르는 레이디들은 그 모습이 오히려 멋있다며 얀시를 흠모하고는 했다. 그런 평소 모습은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생이고 뭐고 얀시는 나에게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여 왔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과하게 친밀했다. 놀란 표정을 황급히 숨긴 히아신스가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래요, 엘로디 양. 모처럼 오랜만에 만났는데 마수 토벌전 시작하기 전까지 같이 이야기 나눠요. 네?”
애초에 워낙 포악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터라 사교계에서의 나의 입지는 아주 희박했다. 당연히 히아신스와도 교류한 적이 없었다. 오며 가며 간혹 눈인사를 나누는 정도일까.
장차 페르디아 공작 부인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토벌전이 시작하기 전이라면 담소를 나누는 것도 좋겠네요.”
내가 흔쾌히 동의하자 히아신스가 우아하게 웃었다.
“그럼 제 친구들을 소개해 드릴게요. 얀시 님도 함께 가시겠죠?”
힐긋 얀시를 쳐다보는 눈길에서 사심이 느껴졌다. 분명 눈치 빠른 얀시는 히아신스의 속마음을 눈치챘을 텐데도 늘 그렇듯 그림 같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오늘은 리리의 호위로 참석했으니, 눈치 없게도 그 자리에 참석해야겠네요.”
“무슨 소리예요, 얀시 님. 모두 환영할 거예요. 자, 그럼 이리로-.”
히아신스가 제 친구들에게로 우리를 안내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저 멀리서 소란스러운 외침이 들려왔다.
얀시가 멀찍이서 손을 흔드는 카를로트를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아, 저거. 엄청 짜증 날 때 짓는 웃음이다.
카를로트가 재촉하며 우렁차게 외치자 결국 얀시는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자리를 비워도 된다고 했을 때는 칼같이 거절하더니 카를로트의 부탁은 또 거절 못 하는 걸 보니, 그래도 가족을 생각하긴 하는구나 싶었다.
얀시가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는 레이안에게 눈짓하자, 레이안이 잠깐 미간을 찌푸리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고용주도 아닌 사람에게 명령받아서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다녀오세요, 얀시 님. 엘로디 양은 제가 잘 챙길게요.”
히아신스가 생글생글 웃으며 내게 팔짱을 꼈다.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닌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팔짱을 끼는 게 불편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래. 나도 이제 친구 좀 사귀고, 새 출발 하는 거야……!’
친구 한 명 없던 망나니 엘로디 페르디아는 안녕이다. 부푼 기대를 안고 히아신스의 친구 무리에 합류한 나는 곧 억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엘로디 양. 얀시 님은 어떤 음식을 제일 좋아하시나요?”
“저어, 카를로트 님은 휴식 시간에 주로 뭘 하세요?”
그랬다. 이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얀시와 카를로트뿐이었다. 도대체 그 두 인간의 어떤 면을 보고 이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 어물쩍 넘기는 수밖에.
“엘로디 양은 아실 거 아니에요? 한 가지만 알려 주세요. 네?”
하지만 남자에 눈이 먼 소녀들은 끈질겼다. 결국 먼저 두 손 두 발을 든 건 나였다.
“얀시 오라버니는 단 걸 좋아해요. 이가 썩어 버릴 정도로 엄청 단 것.”
참고로 얀시는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식적인 성격상 거절하지도 못하고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고맙다고 인사하겠지? 오늘 이후로 달콤한 간식을 잔뜩 선물 받게 될 얀시를 생각하니 어쩐지 즐거워졌다. 얀시에게 쌓인 게 많으니 이 정도는 복수도 아니었다.
나는 평소 카를로트의 행적을 떠올렸다. 일어나서 검술 수련하고, 아침 식사하고 검술 수련하다가, 점심 식사하고 내 침실에 와서 괜히 말 한번 건 다음, 공부를 아주 조금 개미 눈물만큼 한 후에 또 검술 수련하고, 그 이후에 저녁을 먹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나는 그 모든 일과를 짧게 축약해서 대답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사실을 이야기했을 뿐인데, 영애들은 뭐가 그렇게 대단한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대체 그 검술 바보의 어디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말의 연속이었다.
“페르디아 공작 각하께서 엘로디 양에게 용돈을 그렇게 많이 주신다면서요?”
이제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저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나는 추임새도 넣지 않고 가만히 앉아 그녀들의 수다를 구경했다. 새삼 폐쇄적인 페르디아 가문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비추어지는지 실감했다. 4대 가문 중 하나. 황가와 비견할, 아니, 어쩌면 우위에 있을 정도로 드높은 명예와 엄청난 부. ‘파괴’라는 권능 속성답게 눈에 띄는 무위와 수려한 외모까지. 선망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역시 얀시와 카를로트에 대한 평가는 인정할 수 없었다.
‘내 눈에는 겉만 멀쩡하지 한심한 두 인간일 뿐인데.’
아무래도 거의 평생을 친남매라고 생각하고 자라서 그런 걸까. 친구 만들기는 글렀다. 그냥 빨리 마수 토벌전이 시작되기나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한 영애가 내게 말을 걸었다.
“요즘 엘로디 양에 대해서 다들 이야기하고 있는 거 아시나요?”
“네. 모두 엘로디 양과 친해지고 싶어 한답니다. 하지만 워낙 엘로디 양이 외출도 삼가고,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으니 기회가 없었지요.”
대충 대답하며 연약한 척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다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기 전까지 너무 예민한 성격 탓에 자주 앓고는 했으니까.
“앞으로 엘로디 양과 교류할 기회가 있을까요? 괜찮다면 저희 가문에 들러 주시면 좋겠어요.”
페르디아에 대한 선망은 남 얘기로 여겼었는데, 이들이 나를 페르디아의 일원으로 대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때, 한 영애가 나를 불렀다.
어디더라. 린드그린 백작가의 여식이었나.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새침하게 물었다.
“기분 상하셨나요? 죄송해요. 저는 그냥 4대 가문 직계인데도 권능이 없으니까 평소에 상심이 클까 봐 걱정되어서 말을 꺼낸 것뿐인데…….”
걱정하는 척하면서 나를 조롱하는 것이었다. 권능도 없는 주제에 페르디아인 척하는 네 꼴이 우습지 않냐고. 한 사람의 간접적인 공격에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다들 우물쭈물하며 나와 레이디 린드그린의 눈치를 보았다. 그때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영애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그래도 레이디 페르디아는 이슈타르의 구원자로 기적을 일으켰는걸요…….”
딱 봐도 소심해 보이는 그녀는 긴장으로 두 손을 꽉 모아쥐면서 말을 끝마쳤다.
레이디 린드그린이 다소 차갑게 대답했다. 노골적인 무시에도 그레텔이라는 영애는 서운해하거나 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무시당하기 일쑤라는 의미기도 했다.
“대화에 함부로 끼어든 건 저를 무시하는 거잖아요. 하, 그레텔 양이?”
나는 내 편을 들어 줬다가 졸지에 면박당한 그레텔을 유의 깊게 보았다. 그레텔 상파뉴. 의미는 없지만 어쨌든 원작에서 곤경에 처한 에스텔을 도와주는 사건을 계기로 친해지는 한미한 남작가의 영애였다. 워낙 소심하지만 성격은 착하다는 묘사가 있었다.
슬슬 대화 당사자인 내가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이 무리의 우두머리 격인 히아신스가 먼저 나서 정리를 시작했다.
“엘로디 양에게는 좋지 않은 장면을 보여 드렸네요. 그리고, 그레텔 양은 당분간 모임에 나오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그레텔 양 하나 때문에 모임의 분위기가 나빠지지 않았나요.”
음. 사과해야 할 사람은 그레텔 양이 아니라 레이디 린드그린인 것 같은데. 성질을 못 이기고 한마디 하려고 할 때, 때마침 얀시가 나를 찾아왔다.
얀시의 등장에 자리에 있던 소녀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어떻게든 얀시에게 잘 보이려는 노력이 가상했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일들은 새하얗게 잊은 듯했다. 물론 나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별 이야기 안 했어요. 페르디아인데도 권능 없는 제가 불쌍하다고 그러더라고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얀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그에 반해 나는 방긋 미소 지었다.
내가 친절하게 레이디 린드그린을 향해 한 손으로 정중하게 가리키자 얀시의 싸늘한 시선이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얀시의 등장에 선망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이 이제는 새하얗게 질렸다.
사실 밖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식적인 얼굴을 유지하는 얀시가 정색하는 건 내 계산 밖이긴 했다. 얀시의 정색을 처음으로 맛봤을 영애들은 하나같이 놀란 얼굴이었다. 이만하면 됐다. 나는 얀시의 팔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얀시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내 손길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레텔을 지나치며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 드디어 마수 토벌전의 준비가 얼추 끝났다. 귀족들은 준비된 지정석에 앉아 토벌전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 와중에 사람들의 시선을 한데 모으는 생소한 물건이 있었으니, 허공에 떠 있는 사각형의 판들이었다. 이른바 스크린.
“이번에 서마탑에서 개발한 송신……? 마도구라고 하더군요.”
“네. 저 송신 마도구에서 영상이라는 게 떠서 중계한대요.”
팟! 작동 소리와 함께 송신 마도구에 영상이 떠올랐다.
분할된 스크린에 산맥 곳곳 참가자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놀라는 귀족들의 반응을 보며 나는 뿌듯해졌다.
내가 기뻐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저것도 내가 투자한 마도구 중 하나였으니까. 마수 토벌전의 시작이 임박하자 그제야 4방위 마탑주들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오늘의 목표인 게이브 제나이드도 자리에 앉았다.
게이브는 얼굴을 대부분 가리는 마법사 로브를 쓰고 있었다. 크룬델 공작이 얼굴을 확인하는 게 오늘의 목적인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시스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필수 참석인데도 불참하는 패기가 정말 이시스다웠다. 잠시 후, 긴 나팔 소리와 함께 드디어 마수 토벌전이 시작되었다. 콰아아아앙! 시작과 동시에 세상이 무너질 듯한 세찬 진동이 참관석까지 뒤흔들었다. 강진이라도 벌어진 것 같았다. 혼비백산한 귀족들과 달리 내 옆자리에 앉은 얀시는 침착하게 송신 마도구를 보았다.
송신 마도구 속 카를로트가 산맥을 부수고 있었다. 권능을 미친 듯이 써 대며 마수를 학살하는 카를로트는 정말 물 만난 물고기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지반과 마수가 사라졌을까. 갑자기 카를로트가 우뚝 멈춰 서서는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두 손을 흔들었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조리 내게로 쏠렸다.
[누님이 하라는 대로 내가 다 박살 내고 올게! 기다려!]

야, 내가 언제 박살 내라고 했냐? 1등 하라고 했지! 하지만 사람들은 경악한 눈으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평소의 소문과 행실 때문인지 정말로 내가 박살 내라고 시켰다고 믿는 듯했다.
졸지에 나는 산맥 파괴범의 배후가 되고 말았다.
128화. 겁쟁이는 누님한테 안 어울립니다
6–7 minutes

카를로트 페르디아는 흡사 마수 토벌전의 악귀였다. 평소 권능을 터트릴 곳도 없이 억누르고 살아온 만큼 날뛰는 기세가 흉흉했다.
으하하! 말에 올라탄 채로, 카를로트는 호기롭게 웃으며 한 영식이 상대하고 있던 마수의 머리를 가볍게 베었다. 풀썩. 쓰러진 마수의 몸체에서 핵이 번뜩거렸다. 카를로트의 스콰이어가 황급히 쫓아다니며 마수의 핵을 수거했다. 수거한 핵의 숫자로 승자를 판가름하기 때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를로트는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며 권능을 발산해 댔다. 콰과과과-! 카를로트의 권능에 사방의 땅이 뒤흔들리고 갈라지고 꺼졌다. 비틀거리던 스콰이어가 겨우 중심을 잡으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카를 님! 권능 좀 작작 쓰십시오! 핵이 갈라진 땅 틈으로 다 사라져 버리잖습니까!”
카를로트는 스콰이어의 분에 찬 고함을 한 귀로 흘리며 금색 눈을 반짝였다. 다음 목표물을 물색하기 위하여. 어차피 토벌해야 할 마수들은 차고 넘친다. 핵 몇 개 정도 놓친다고 해서 결과에 아무 지장 없으리라.
이번에 송신 마도구를 도입하여 토벌하는 과정을 참관객이 모두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오늘 참석한 누님도 그를 보고 있을 것이다. 엘로디 앞에서 한 번도 저가 얼마나 강한지 제대로 보여 준 적 없었다. 심지어 꼴사납게 암살자에게 당하기까지 하지 않았나. 오늘 토벌전은 그 뼈저린 실책을 만회할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카를로트는 행복한 상상을 하며 토벌전에 집중했다. 콰아아앙! 전방을 향해 권능을 발산하자 지반이 뒤흔들리며 푹 꺼졌다. 그 탓에 파편들이 근처에 있던 다른 참가자들에게까지 마구 튀어 댔다.
매해 살판나서 날뛰긴 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상대하고 있는 마수까지 건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뭐에 씌인 것처럼 마수가 보이면 사정없이 공격해 댔다. 덕분에 카를로트의 스콰이어만 핵을 수거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참가자들이 울분에 차 원성을 터트렸다.
카를로트 페르디아가 공공의 적이 되고 있을 그 시각.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점에 아덴미르가 있었다. 그 또한 마수 토벌전에 참가한 참가자였다. 아덴미르는 이번 토벌전따라 활기찬 카를로트의 행보를 보며 픽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 마수 토벌전을 이 산맥으로 추진한 자가 바로 재상이었다. 골치를 썩이던 마수 처치는 물론이고, 산맥의 평탄화 작업까지 손쉽게 처리할 수 있으니 지금쯤 입이 귀에 걸렸으리라. 아덴미르의 기사가 천천히 말을 몰며 다가왔다.
기사는 한가로운 주변을 둘러보며 그에게 물었다. 아덴미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마수 한 마리라도 빼앗았다가는 미움 살 것 같아서.”
이해를 못 하고 되묻는 기사에게 설명하는 대신 아덴미르는 허공을 돌아다니는 마도구를 올려다보았다. 송신 마도구를 보고 있자니 아까 카를로트가 했던 선전포고가 떠올랐다.
“누님이 하라는 대로 내가 다 박살 내고 올게! 기다려!”
그러자 자연히 그 대상의 얼굴도 함께 떠올랐다. 엘로디 페르디아. 그의 전 약혼녀. 아마 바쁘게 비행하며 돌아다니는 송신 마도구를 통해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아덴미르는 문득 마차에서 내리던 엘로디를 멀찍이서 보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마수 토벌전에는 단 한 번도 참관한 적 없는 그녀가 웬일로 참석했는지 의아해하는 그때, 크룬델 가문의 마차가 들어섰다. 다른 이들은 눈치채지 못한 듯하지만 아덴미르는 느꼈다. 엘로디와 레온 크룬델 사이에 오간 묘한 눈빛을. 의외였다. 그의 전 약혼녀는 호위로 데리고 다니는 용병왕과 무언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관계를 정리했다기에는 오늘도 엘로디는 호위로 용병 이안을 데리고 왔다. 엘로디의 마음이 어디에 향한 건지 헷갈렸다. 그런 복잡한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마침 중형 마수 한 마리가 후방에서 접근하는 것을 느꼈다. 그의 기사가 알아채기도 전에 아덴미르가 먼저 움직였다. 권능을 쓸 필요도 없었다. 발검과 동시에 아덴미르가 내지른 검의 궤적에 마수가 둘로 갈라져 풀썩, 쓰러졌다.
마수의 피가 묻은 검을 한번 털어 낸 그는 도로 검을 칼집에 넣었다. 벨트란이 참가 의사를 밝히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참가하게 되었을 뿐, 아덴미르는 토벌전 우승에 관심 없었다. 그는 대충 구색 갖추기용으로 접근하는 마수만 베어 내며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날뛰던 구역의 마수가 씨가 말랐는지 카를로트가 아덴미르가 있는 방향으로 기세 좋게 접근했다.
“1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마수는 많이 잡으셨습니까?”
카를로트는 아덴미르를 빤히 쳐다보다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머리를 돌렸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1황자 근처에서 토벌하는 건 좀 그랬다.
아무리 페르디아라지만 황자를 건드린다면 제법 귀찮아질 테니까. 카를로트는 아덴미르의 존재가 상당히 찝찝했다. 엘로디의 약혼자였다는 사실을 차치하고, 두 사람의 관계가 눈에 거슬렸다. 아덴미르가 약혼녀인 엘로디에게 형식적인 대우만 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 탓에 아덴미르를 마주하면 누이를 배척했던 제 과거가 떠오르는 것이다. 엘로디를 소홀하게 대한 아덴미르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보다 더 최악이었던 제게는 그럴 자격조차 없다는 걸 자각하게 되니까.
얼마 가기도 전에 카를로트는 양옆에서 튀어나온 중형 마수 세 마리를 맞닥뜨렸다.
씨익 웃으며 카를로트가 검을 제대로 쥐었다. 온몸에 피가 끓는 듯 기분이 좋았다. 콰르릉! 권능으로 땅을 무너뜨리는 순간 마수를 베며 스쳐 지나갔다. 마수들은 갈라진 대지 틈 사이에 끼어 그대로 절명했다.
“아, 카를 님. 이렇게 땅에 묻어 버리면 핵은 어떻게 수거하란 말입니까!”
연신 짜증을 터트리는 스콰이어를 무시하고 카를로트가 권능으로 엉망이 된 지역을 지나가려던 그때였다.
갑자기 스콰이어가 숨을 급히 들이마시며 카를로트를 불렀다.
“툴툴거리지 말고, 핵 못 꺼내겠으면 그냥 버리…….”
당연히 핵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분명 금방 카를로트가 처치한 세 마리의 마수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땅을 뚫고 올라오고 있었다. 더 기가 막힌 건, 그 마수들이 융합하듯 하나로 뭉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득, 우드득……. 그 광경을 본 건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바로 근처에 있던 아덴미르와 기사도 이상한 마수를 똑똑히 보았다.
아덴미르는 보고로 받은 바 있던 ‘이형의 마수’를 떠올리며 발검했다. 하지만 정체를 모르는 것을 섣불리 공격할 수는 없었다. 아덴미르는 제 기사와 카를로트의 스콰이어에게 멀찍이 물러나라 눈짓했다. 아덴미르가 신중을 기하자, 흘끔 쳐다보던 카를로트가 말에서 내렸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멋모르는 페르디아의 애송이가 하는 말이니 그냥 흘려들으면 될 텐데, 신경에 거슬렸다. 같잖은 도발이라는 걸 알지만, 아덴미르는 곧바로 말에서 내려 카를로트의 옆에 섰다.
맞받아치는 말에 카를로트가 ‘하’ 하고 웃었다. 두 사람은 누구랄 것 없이 동시에 이형의 마수를 향해 공격을 날렸다. *** “우와, 개판이네…….” 마수 토벌전을 관전하는 나의 감상이었다. 다른 참가자들이 처치하는 마수까지 베어 버리는 카를로트의 버르장머리없는 행동에 혀를 찼다.
얀시에게 묻자 그가 다정하게 웃으며 답했다.
안 된다는 말을 왜 이렇게 상큼하고 다정하게 하는 거람? 카를로트에게 민폐는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어도, 참관석과 토벌전이 벌어지는 곳과의 거리는 상당히 멀었다. 몰래 통신 마도구로 통신을 시도했지만, 들고 오지 않은 건지 반응이 없었다. 카를로트는 땅을 아예 갈아엎으면서도 종종 공중을 떠다니는 송신 마도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럴 때마다 참관객들의 시선이 죄 내게 쏠려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다.
억울해. 어차피 바닥 중의 바닥인 내 평판에 흠집 하나 난다고 티가 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한 적도 없는 일로 오해받는 건 심하게 억울하다고. 어쨌든 사람들 시선이 송신 마도구 스크린으로 향한 틈을 타 나는 종종 게이브를 관찰했다. 여전히 게이브는 미동 없이 앉아 있어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다. 최대한 주의하며 레온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또한 게이브를 관찰하는 중이었다.
‘바람이라도 확 몰아쳐서 저 로브를 벗겨 버리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런 요행이 일어날 리 없었다. 에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송신 마도구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이상한 소리가 참관석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 출처는 다름 아닌 송신 마도구였다. 곧이어 드러난 괴이한 모습이 실시간으로 송신 마도구에 떠올랐다.
곳곳에서 경악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카를로트가 처치한 마수가 저들끼리 엉겨 붙으며 새로운 몸체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세 마리가 융합해 새로운 종을 만든다는 마수는 마수 도감에서도 본 적 없었다.
얀시는 송신 마도구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내게 대답했다.
“카를이 있는 곳과 거리가 있어서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1황자도 있으니까 별일 없겠지. 괜찮아, 리리.”
그러면서 안심시키듯 은근슬쩍 내 손을 잡는 게 정화의 권능 때문이 아닐 거라고 믿었다. 얀시의 말마따나 카를로트와 아덴미르의 공세는 맹렬했다. 쉴 새 없이 터지는 권능과 검기에 송신 마도구에 잡히는 화면은 번뜩이는 잔상뿐일 정도였다. 합이 맞지 않아 서로를 공격할 뻔한 위험한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지만, 마수를 처치한다는 공통의 목적만은 잊지 않았다. 이형의 마수는 괴기한 등장과 달리 공격 수단이 두 팔과 꼬리밖에 없었다. 그뿐 아니라 동작이 매우 굼뜨기까지 했다. 살갗이 두꺼워 베는 게 어려운 듯했지만, 여러 번 공격하니 그 두꺼운 표피도 견디는 데 한계가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리고, 이내 바닥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수가 균형을 잃은 틈을 타 아덴미르가 약해진 마수의 표피에 검을 내리꽂았다. 푸와악! 새파란 마수의 피가 카를로트와 아덴미르의 위에 튀었다. 쿵! 그와 동시에 마수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참관석의 모두가 두 사람의 마수 토벌에 환호성을 터트렸다. 하지만 환호는 오래가지 못했다. ……털썩. 카를로트와 아덴미르가 동시에 허물어졌기 때문에.

몇 초가 지났지만 두 사람에게는 어떤 미동이 없었다.
참관석에 침묵이 흘렀다. 들리는 거라고는 송신 마도구 너머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뿐. 뭔가 잘못되었다. 그 사실을 모두가 깨닫자마자 재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마수 토벌전은 중단되었다.
129화. 페르디아의 진정한 실세
5–7 minutes

토벌전 도중 참가자가 부상 당하는 상황은 종종 있어 왔다. 그런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도 존재했다. 가장 먼저 토벌전이 진행되는 장소로 대기 중이던 황군을 파견하여 마수 처치 후 부상자를 운송한다. 부상의 경중에 따라 치료 방법을 달리하고, 다시 토벌전에 참여할지 중도 탈락할지 황궁의가 결정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토벌전의 중단은 없었다. 이번 같은 중도 중단 선언은 유례없는 일이라고 했다. 무려 부상 대상이 제국의 1황자와 4대 가문의 직계니 다들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이미 두 사람이 쓰러진 곳으로 황군이 파견된 후였다. 여전히 쓰러진 두 사람의 모습은 송신 마도구를 통해 고스란히 참관석에 비치고 있었다.
“두 분 다 마수한테 공격받지는 않았는데, 왜 갑자기 쓰러지신 걸까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사이에 공격당한 걸 수도 있지 않나.”
수런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송신 마도구를 노려보듯 쳐다보았다.
쓰러진 카를로트와 아덴미르의 가슴이 미약하게나마 오르내리는 게 보였다. 멀찍이 피해 있던 아덴미르의 기사와 카를로트의 스콰이어가 두 사람의 상태를 살피는 것까지 확인했다. 얀시 또한 카를로트가 살아 있다는 걸 본 후, 나를 안심시키듯 손등을 토닥거렸다. 하지만 이어진 얀시의 말은 그렇게 다정하지 못했다.
“나서기 좋아하는 2황자가 이번 토벌전에는 불참했잖니. 1황자를 제거하려고 한 게 아닐까 싶은데. 카를이 운 나쁘게 휘말린 게 아닐까 해.”
얀시가 그렇게 추측하는 것도 영 뜬금없지는 않았다. 황비라면 아덴미르를 제거할 목적이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처리 방식이 황비답지 않았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까지 눈치채지 못할 독으로 은밀하고 느긋하게 황제를 무너뜨리는 황비가, 그렇게 눈에 띄는 짓을 한다고?’
보는 사람이 많은 마수 토벌전에서 일을 벌이는 건 황비의 성격과 맞지 않았다. 애초에 마수를 이용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싶었다. 아니, 잠깐. 그냥 마수가 아니었다.
‘세 마리가 한 마리로 융합한, 이상한 마수였는데. ……설마!’
나는 퍼뜩 고개를 들어 누군가를 찾았다. 사람을 찾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까부터 계속 힐끔 쳐다보던 곳에 있었으니까.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게이브 제나이드는 입꼬리를 미세하게 끌어올려 피식 웃었다.
저 웃음의 의미는 대체 무엇일까. 나는 마담 몽고메리의 무도회에서 있었던 사건의 배후에 게이브가 있다고 확신했다. 그때도 분명 균열을 통해서 마수가 튀어나왔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게이브와 관련된 게 아닐까. 송신 마도구가 비추지 않은 곳에 균열이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증거는 없었다. 심증만 충분할 뿐. 시선이 마주친 건 찰나였다. 게이브는 태연히 고개를 돌려 유유히 자리를 벗어났다. 이미 마수 토벌전이 중단되었으니 마탑주가 자리를 지키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이대로 그냥 보내는 게 찝찝하긴 했지만 붙잡을 명분이 부족했다. 그러다 문득 오늘 이곳에 온 이유를 떠올렸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으니, 레온도 충분히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각도였다. 레온을 바라보자 그는 게이브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게이브가 완전히 자리를 떠난 후, 레온이 내 쪽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 헛걸음을 한 건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 오래지 않아 카를로트와 아덴미르가 들것에 실려 참관석이 있는 안전지대에 도착했다. 토벌전이 중간에 중단되었지만 먼저 돌아간 사람은 게이브가 유일했기 때문에 상황을 지켜보는 눈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대기하고 있던 황궁의는 총 셋. 토벌전의 참관객은 물론이고 참가자들까지 복귀한 가운데, 가장 연륜 있는 황궁의가 진찰을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의식이 없는 두 사람을 진찰한 황궁의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푹 조아렸다.
“두 분 모두 마수의 독에 당하신 듯합니다. 두 분께서 뒤집어쓴 마수의 푸른 피가 원인인 것 같습니다만…….”
황궁의의 목소리는 침중하기 그지없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물리적인 공격을 당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쓰러졌으니까. 성질 급한 재상이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재촉했다.
우물쭈물하던 황궁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차마 얀시 쪽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어렵사리 입술을 떼었다.
“두 분을 공격한 마수가 마수 도감에도 등록되어 있지 않은 신종 마수라……. 손쓸 방도가 없습니다. 송구합니다.”
황궁의가 면목 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의사로서 환자를 포기하겠다는 발언이었다. 무려 1황자와 4대 가문의 직계였다. 이번 토벌전의 장소 선정에 강한 입김을 불어 넣었던 재상은 행여 이 일로 제게 피해가 갈까 두려웠던 건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래도 다른 방법이 있겠지. 나머지 황궁의도 진찰해 보도록!”
재상의 닦달이 보람 없게도 두 황궁의의 대답도 같았다.
“우선 중화 작용을 돕는 약을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만, 차도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목숨이 위태롭다는 비보에 구경꾼들 모두 나와 얀시의 눈치를 보며 작은 소리로 속닥거렸다.
“페르디아 공작 부인이라면, 해결책을 알지도 모르잖는가. 독에 관련하여 그분보다 해박한 자가 없을 정도니…….”
“그래, 맞아. 얼마 전에 유통되었던 독의 해독제가 그 약제사 작품이라고 하더이다.”
속닥거리는 사람들의 말을 용케 들은 재상이 다급히 소리쳤다.
“뭣 하는가! 속히 페르디아에 상황을 알리고 사람을 보내 부인을 모셔 와라! 그, 그, 약제사도!”
재상의 명을 받은 황군 하나가 발걸음을 떼는 순간, 두 사람의 입에 중화제를 흘려 넣던 황궁의가 말했다.
“소용없습니다, 각하. 독성이 빠르게 퍼져 남은 시간이 길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페르디아 저택에 당도하기도 전에 두 분은…….”
그때 줄곧 침묵하던 얀시가 황궁의에게 질문했다.
“감히 추측하건대 한 시간가량 버티실 수 있을 겁니다. 이것도 두 분께서 영웅의 후손이라 가능한 일입니다. 일반인이었으면 이미 유명을 달리했을 겁니다.”
지금 두 사람을 영웅의 후손이라고 떠받들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송신 마도구를 통해 두 사람이 쓰러지는 광경을 봤을 때부터 이런 상황을 예견했다.
나는 속으로 푹푹 한숨을 내쉬면서도 몇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난감한 속내를 감추고, 나는 방긋 웃어 보였다. 두 사람이 죽을까 봐 전전긍긍하던 재상이 미간을 좁히며 나를 쳐다보았다.
“엘로디 양. 동생이 걱정되는 마음은 알겠다만, 나설 때 안 나설 때를 구분하는 게 좋겠군.”
나는 얼굴의 웃음기를 지우고 재상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를 막으신다면 1황자 전하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을 텐데요.”
카를로트는 내가 살릴 거니까 상관없지만. 재상이 협조해 주지 않으면 아덴미르를 해독하는 건 어려웠다. 하지만 되도록 한 번에 두 사람을 해독하고 싶었다.
친구를 죽게 놔둘 수는 없지 않은가. 재상과 대치하는 가운데 얀시가 내게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얀시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바로 알아들었다. 눈치 빠른 얀시라면 내가 평소에 권능 발현을 했다는 걸 타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 하지만 지금 이 많은 사람 앞에 나선다면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영원한 비밀은 없다.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었다. 어차피 구원자 사건으로 조용히 살겠다는 내 바람은 다 물 건너갔다. 권능 검증을 피했던 이유도 페르디아 공작에게 들킬까 봐 그랬지만, 이미 모든 사실을 털어놓은 지 오래고. 얀시와 내가 속닥거리자 재상 또한 내게 뭔가 있음을 깨달았는지 태도를 바꾸었다.
여전히 미덥지 않다는 듯 내게 묻는 재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는 방긋 웃었다.

*** 엘로디 페르디아와 권능. 그것만큼 서로 연관 없는 단어가 있을까. 엘로디의 선언에 참관석의 모든 이가 술렁대었다.
가장 놀란 것은 히아신스와 그 무리였다. 특히 레이디 린드그린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자신이 한 말이 있기 때문이었다.
‘권능이 있으면서도 앙큼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단 말이야? 설마 일부러 내게 창피를 주려고!’
레이디 린드그린이 자의식 과잉 착각을 하든, 사람들이 놀라건 말건 그건 모두 엘로디의 관심 밖이었다. 재상은 엘로디의 말을 듣고서도 영 미덥지 않다는 듯 말을 돌렸다.
웅성웅성. 권능 발현에 이어 자신이 페르디아의 약제사라는 충격 발언까지! 한 번에 두 가지 폭탄선언에 구경꾼들은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정작 당사자는 태연하기만 했다.
엘로디의 등 뒤에 있던 얀시가 다정하게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한마디 했다.
재상이 허탈한 침음을 내뱉었다. 그러자 얀시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내 동생 말을 믿고 말고는 자유지만, 이대로 1황자 전하께서 잘못되신다면 재상께서는 책임을 완전히 면피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엘로디가 방긋 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얀시까지 가세하자 재상 또한 더 이상 비협조적으로 굴 수 없었다. 어차피 황궁의가 포기한 이상 다른 방법도 없었다.
“좋소. 더 늦기 전에 무슨 수라도 쓰는 게 좋겠군.”
드디어 재상의 허락이 떨어졌다. 보란 듯 권능을 내보일 줄 알았지만, 엘로디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몰려든 사람들을 한 번 둘러본 후 재상에게 요청했다.
“우선 두 사람을 실내로 옮겨 주시겠어요? 되도록 보는 눈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제가 부끄러움을 좀 타서.”
권능 발현을 알리긴 했지만, 굳이 권능을 사용하는 방법까지 고스란히 내보일 필요는 없으니까. 재상의 명령에 황군이 두 사람을 간이 막사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엘로디가 얀시에게 귓속말했다.
특히 페르디아 부인에게 함부로 권능을 썼다고 크게 혼날지도 모른다.
얀시는 그저 순종적으로 미소 지었다. 이내 환자의 이송이 끝나자 두 사람이 자리를 떴다. 남은 사람들은 그 광경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존재감 없던 페르디아의 망나니 공녀는 이제 없었다. 그들이 본 건 천사 같은 얼굴로 얀시 페르디아를 등에 업고 재상을 좌지우지하는 페르디아의 진정한 실세였으니까.
130화. 아덴미르의 자각
6–7 minutes
그 시각, 레이안은 은밀히 누군가의 뒤를 쫓았다. 그림자 속에 녹아들어 기척을 죽인 채 기민하게 움직였다. 마수 토벌전에 호위로 참석하면서 레이안이 엘로디에게 받은 임무인 ‘게이브 제나이드 감시’의 연장선이었다. 토벌전이 진행되는 내내 레이안은 게이브를 감시했다. 하지만 그는 달리 특이한 행동을 보인 적은 없었다. 그저 미동 없이 송신 마도구만 빤히 바라볼 뿐. 게이브가 아무 짓도 벌이지 않았지만, 신종 마수가 발생하여 부상자가 속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과연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인가. 그냥 넘어가기에는 찜찜한 상황이었다.
특유의 질질 끄는 걸음걸이로 게이브는 인적이 드문 곳으로 느긋하게 들어갔다. 마탑주로서 수행원을 둘 법도 하건만 그는 혼자였다. 우거진 나무 사이를 걷던 게이브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게이브는 뭔가 생각하는 듯 등 뒤를 둘러보다 어느 지점을 빤히 쳐다보았다. 놀랍게도 레이안이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레이안은 당황하지 않았다. 눈이 마주친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럴 리 없었다. 그림자에 은신한 지금, 권능의 힘을 빌린 그의 존재를 눈치챌 존재는 없었으니까. 레이안의 확신에 힘을 실어 주듯 게이브는 다시 앞을 보고는 발을 질질 끌며 걷기 시작했다. 이내 게이브가 도착한 곳은 한 마차 앞이었다. 어떤 가문의 표식도 없는, 평범하디평범한 마차였다. 마부 또한 외모에 특징이 없는 아주 평범한 청년이었다. 레이안은 마부의 외모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혹시 누군가 먼저 타고 있는 게 아닌가 기척을 살폈지만, 탑승자는 아무도 없었다. 게이브가 당연하다는 듯 마차에 오르는 동안에 아무도 접근하지 않았다. 덜커덩, 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잠깐 고민하던 레이안은 발걸음을 돌렸다. 임무는 여기까지. 엘로디를 두고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떠날 수는 없었다.

*** 엘로디의 말 한마디에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두 환자를 눕혀 두기 위한 임시 막사가 빠르게 지어졌다.
‘으으음, 엄밀히 말하면 내가 말하면 재상이 그대로 명령을 내린 거긴 하지만, 그렇다고 치자.’
10분 정도가 지나자 재상이 엘로디와 얀시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고작 10분으로 모든 준비를 끝마치다니, 재상의 능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까는 정말 고집불통이더니 한번 마음을 먹으니 행동 하나는 빨랐다. 마지막으로 황군이 정신을 잃은 아덴미르와 카를로트를 옮겼다. 그때 어딘가로 사라졌던 레이안이 엘로디 옆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엘로디는 혹시 누가 엿들을지 모르니 호칭을 주의하며 대답했다. 이번에도 게이브 제나이드에 대한 물증을 찾는 데 실패했다. 그건 어쩔 수 없으니, 우선은 당장 눈앞에 닥친 일을 해치워야 했다. 엘로디가 막사 쪽으로 한 걸음 떼었을 때 레이안이 그녀를 불렀다.
줄곧 엘로디가 하는 일에 어떤 의문도 반박도 제시하지 않던 레이안의 뜻밖의 물음에 그녀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다름없이 무뚝뚝하고 수려한 이목구비가 보였다. 다만 그때와 차이가 있다면, 무감한 표정 아래 감춰진 감정을 일부 엿볼 수 있다는 것일까. 엘로디는 알 수 있었다.
독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음독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니까. 엘로디가 손을 뻗자 레이안이 닿기 쉽도록 머리를 숙여 주었다. 그녀는 결 좋은 검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레이안은 엘로디가 막사에 들어가는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레이안 비에탄에게 기다리는 것은 가장 끔찍한 일이었다. 당신은 모른다.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처럼 영원한 잠에 빠진 당신이 깨어나기를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끝끝내 보여 주지 않는 연분홍 눈동자를 찾아 헤매며 얼마나 오랜 시간 방황했는지.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레이안은 엘로디를 붙잡을 수 없었다. 엘로디가 기다리라고 말했으니까. 그에게 엘로디의 말은 황명보다 위에 있었다. 거역할 수 없는 진리였다. 레이안은 호위로서 막사 밖에서 묵묵히 임무를 수행했다. *** 임시 막사 내부. 엘로디는 드디어 두 사람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장기가 굳어 가기라도 하는지 두 사람의 생체 반응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었다. 호흡도, 심박도, 시시각각 느려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마음이 조급해지는지 황궁의가 엘로디를 닦달했다. 사실 어떤 독이든 해독할 수 있기 때문에 상태를 살피는 과정은 필요 없었다. 무슨 독인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중독 상태를 살핀 이유는 음독 후 후유증이 얼마나 갈지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그 자리에서 엘로디의 중얼거림을 알아들은 사람은 얀시밖에 없었다. 해독 전, 엘로디는 안 될 걸 알면서도 괜히 물어보았다.
“양해 바라네, 엘로디 양. 최소의 인원만 남기지 않았나. 엘로디 양에게도 증인이 있는 편이 좋을 것이야.”
황궁의는 당연히 황족을 해독하는 과정이니 함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재상은 증인을 자처했다. 어차피 언젠가 밝혀질 해독 방법이니 비밀이 퍼져나간대도 큰 타격은 없었다. 다만 최대한 늦게 소문이 났으면 하는 바람일 뿐. 이 정화의 권능이 언제 어떤 식으로 또 쓰일지 모르는 일이니까. 혹시 모를 안전장치로, 엘로디는 두 사람을 보며 당부했다.
“좋아요. 대신 앞으로 무엇을 보든 함구해 주시길 바라요.”
“무슨 그런 걱정을 하니, 리리. 당연히 비밀을 지켜 주실 거야.”
얀시가 웃으며 황궁의와 재상을 차례차례 바라보았다. 분명 그린 듯 상냥하고 다정한 미소였으나 모종의 압박이 느껴지자 그들은 흠칫 몸을 떨었다.
상대는 무려 페르디아였다. 경고에 따르지 않으면 어떤 보복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다. 겁먹은 두 사람의 반응이 흡족한 엘로디가 얀시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얀시가 칭찬을 바라는 듯한 눈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부담스러워진 엘로디가 어색하게 웃으며 황궁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예. 이 병에 든 액체가 마수의 피입니다. 닿으면 바로 중독되니 조심하십시오.”
도대체 독으로 뭘 어떻게 해독하려나 싶어 황궁의와 재상은 잔뜩 긴장한 채 엘로디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어진 엘로디의 다음 행동은 경악 그 자체였다.
거침없이 병의 마개를 딴 엘로디가 마수의 피를 한입에 털어 넣었기 때문이었다.
독의 효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쨍그랑! 손에 힘이 쭉 빠지는 바람에 엘로디가 쥐고 있던 병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까딱하면 정신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기가 찾아왔다. 엘로디가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눈치로 알아챈 얀시가 그녀에게 물이 든 병을 건넸다. 어느 정도 독성이 돌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 후에 엘로디는 권능을 발현했다. 알갱이같이 잔잔한 빛무리가 물 표면에 어렸다가 사라졌다. 해독제가 완성되자 엘로디의 인내도 다했다.
그녀는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얀시는 제 품에 무방비하게 머리를 기댄 동생을 끌어안았다. 잠깐 닿았을 뿐인데도 삽시간에 엘로디의 체온이 훅 내려간 게 느껴졌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독을 마셨지만, 사실 긴장하고 있었던 건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얀시는 축 늘어진 엘로디를 안아 들며 멍하게 서 있는 황궁의에게 눈짓했다.
황궁의가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물병을 쳐다보았다. 얀시가 우아하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건만, 금방이라도 꺼질 듯 두 사람의 호흡이 위태로웠다. 황궁의는 얼른 그들의 입가에 차례로 해독제를 흘려 넣었다. 그러자…….
황궁의와 재상이 동시에 감탄했다. 정말로 두 사람의 상태가 빠르게 호전되고 있었다. *** 아덴미르는 머리가 둘로 쪼개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눈을 떴다. 어물거리는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일렁이는 촛불과 그 뒤로 크게 자라난 사물의 그림자였다.
익숙한 장소에 아덴미르는 곧바로 상황 파악을 했다. 황성의 제 침실. 그곳에 누워 있는 자신. 토벌전 중에 부상을 입고 실려 온 듯했다. 마수의 피를 뒤집어쓰고 정신을 잃은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침실에 들어선 재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아덴미르는 무거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전하께서는 생사를 헤매셨습니다.”
생사를 헤맸다기에는 몸 상태가 지나치게 멀쩡했다. 머리가 아프고 몸이 좀 무거운 것 외에는 달리 불편한 곳이 없었다.
“마수의 피가 극독이었습니다. 한데 마수 도감에도 실려 있지 않은 마수라 해독제가 없어서 곤란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아덴미르는 팔이라도 잘라 냈나 싶어 사지를 살펴보았으나 멀쩡했다. 그러자 재상이 진지한 얼굴로 아덴미르를 응시했다. 기절한 이후에 잠깐 정신을 차린 엘로디에게 당사자인 아덴미르에게는 상황 설명을 위해 권능에 대해 말해도 된다고 허락받은 후였다.
“엘로디 양이 독성을 파괴하는 권능으로 전하를 살리셨습니다.”
엘로디에게는 권능이 없었다. 그건 약혼자였던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최근에 개화한 모양입니다. 음독하면 그 독의 독성을 파괴하여 해독제를 만들 수 있는 권능이라고 합니다.”
아덴미르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건이 떠올랐다. 황비가 부황에게 은밀히 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였다. 저도 모르는 걸 어떻게 아는지 의아했는데, 그게 권능이 개화했기 때문이었나.
아무래도 엘로디가 둘러댄 말인 듯했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저를 도와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아도 지끈거리는 머리가 더 띵해졌다. 매주 받아 온 부황의 해독제를 직접 음독해서 만드는 것인 줄 몰랐다.
한 번 해독제를 만들었으면서 왜 계속 독을 보내 달라고 요청한 건지 줄곧 의아했는데, 그 의문이 비로소 해소되었다. 부황의 목숨 빚에 이어 제 목숨까지 빚지고 말았다.
“권능을 발현하신 후 바로 정신을 잃으셨습니다. 독성이 강하면 고통을 그대로 느끼는 듯했습니다.”
“그 이후에 잠깐 정신을 차리긴 했으니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하.”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저를 구하고자 독을 먹었다는데. 생사를 헤맬 정도의 독성이었다는데 정말로 괜찮은 것인가. 머릿속이 온통 엘로디로 가득했다. 아덴미르가 관자놀이를 꾹 누르자 재상이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쉬십시오, 전하.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달칵. 문이 닫혔다. 아덴미르는 일렁이는 촛불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번에도 엘로디의 도움을 받아 버렸다. 고맙다고 말하면 이번에도 해사하게 웃으며 대답하겠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하고. 멋쩍게 미소 짓는 엘로디의 얼굴을 상상하기만 했을 뿐인데 머저리처럼 웃음이 났다. 그 순간이었다.
한 가지 깨달음이 화살처럼 머릿속을 꿰뚫고 지나갔다. 부정할 수도 없이 분명한 자각이었다. 나는 엘로디 페르디아를……. 은애한다. 이 마음이 사랑의 감정이 아닐 수 없었다.

131화. 혹시 강아지풀이야?
5–7 minutes

아덴미르는 한 손으로 제 이마를 짚으며 실소를 터트렸다. 머리에 열이 올랐다. 중독의 후유증 때문인지, 혹은 감정의 깨달음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자각하고 나니 최근 그가 했던 웃기지도 않는 짓거리들이 모두 부정의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파혼 후 엘로디가 그를 먼저 피하는 게 배려라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접근해서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인 것도. 이제 엘로디가 누굴 만나든 저와 상관없는 일인데도 그녀와 관련된 기사를 읽고 온종일 심란했던 것도. 기어코 친구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불순하게 접근했던 것도. 모두. 전부 다. 의도가 명확했다. 홀로 다른 이유를 붙여 외면했을 뿐이다. 언젠가부터 시선이 갔다. 신경이 쓰였다. 손끝의 거스러미라고 생각하고 방치했더니, 뜯어져 피가 철철 흘렀다.
아덴미르는 제 처지를 알았다.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짧지 않은 약혼 기간 동안 그는 약혼자로서 신뢰를 주지 못했다. 그러니 파혼은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결혼까지 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파혼만큼은 막았다면, 엘로디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을까.’
구질구질한 가정을 하던 아덴미르의 손이 허벅지 위로 툭 떨어졌다. 소용없는 후회였다. 그와 엮이고 싶지 않은 엘로디와의 관계를 일방적 붙잡고 있는 것은 아덴미르 자신이었다. 그러니 이 마음을 고백할 수 없었다. *** 자고로 권능을 사용한 후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잘 먹고 잘 쉬어서 몸을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눈앞의 무시무시한 인간들 때문에.
나는 울먹거리며 얀시를 째려보았다. 그런 내 원망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은 얀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예쁘게 웃으면 다야?
세상에 믿을 얀시 하나 없다. 그래도 뱉은 말은 지킬 줄 알았건만 얀시는 얄궂게도 내 바람을 쉬이 저버렸다. 물론 변호 시도를 하긴 했다.
……라고. 당연히 그 한마디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침대에 앓아누운 초췌한 나를 페르디아 부부가 내려다보았다. 특히 페르디아 공작은 대놓고 미간을 찌푸리며 심기가 얼마나 언짢은지 숨기지도 않았다. 후, 한숨을 내쉰 공작이 팔짱을 끼고 나를 삐딱하게 응시했다.
“웬일로 야외 행사에 참석하고 싶다기에 허락해 주었더니, 어김없이 사고를 치는구나.”
풉. 뒤에서 얀시가 웃음을 꾹 참고 있는 게 보였다. 편들어 줄 것도 아니면서 왜 여기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자 그간 조용하던 탐욕도 내게 한마디 조언을 건넸다.
자존심 같은 건 옛날에 갖다 버린 지 오래였다. 빌어서 될 문제였으면 이미 빌었다. 하지만 저 형형한 눈빛을 보라! 내가 아무리 잘못했다고 해도 제대로 듣지도 않을, 아주 살벌한 표정이었다.
“아픈 녀석이 팔은 무슨 팔. 꼼짝 말고 누워 있어라.”
체벌 생각은 없는지 페르디아 공작은 여전히 무시무시한 얼굴로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주었다. 차가운 얼굴에 그렇지 못한 손길이었다.
“다음부터는 섣불리 음독하지 마라, 엘로디. 마수의 피는 처음이지 않으냐. 혹 해독할 수 없었다면 어쩌려고?”
“지금까지 해독 못한 독은 없었는걸요. 마수 독도 정화한 적 있으니까 처음은 아니에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공작 부인을 슬그머니 바라보았다.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부인은 내 편을 들어 주었다.
페르디아 공작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매를 더욱 찌푸렸다. 하지만 나는 표정과 달리 공작의 기분이 아주 약간 풀렸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럴 때 쐐기를 박는 게 중요했다. 나는 공작에게 내 행동이 그렇게 잘못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또, 제가 거기에 없었으면 카를이 위험했을 거예요.”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모든 독을 정화할 수 있는 내 권능이 아니었더라면 카를로트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대답이 들려온 곳은 다른 쪽이었다.
페르디아 공작이 질책하듯 부인을 불렀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고아하게 미소 지었다.
“리리가 카를을 구한 건 맞잖아요, 각하. 고맙다며 칭찬은 못할망정 혼을 내서 쓰나요?”
이번에도 나를 변호해 주다니, 역시 부인이 최고다! 하지만 감동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물론 섣불리 권능 발현했다고 공개한 건 혼날 만하지만요.”
웃으며 가한 부인의 일침에 나는 축, 시무룩해졌다. 좋다 말았네. 내가 혼나는 동안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얀시가 공작 부인에게 물었다.
“아직 안 일어났단다. 깊게 잠든 모양인 듯하더구나.”
“다행이네요. 이번 일로 깨닫는 바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건 욕심이겠죠?”
두 모자의 하하호호 다정한 대화 속에서 카를로트의 존재가 난도질당했다. 가족들 사이에서 카를로트의 존재가 ‘미친 망아지’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화였다. 꼼지락거리며 턱 끝까지 올라간 답답한 이불을 내린 나는 은근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토벌전 장소로 되돌아가서 단서라도 있는지 살피고 싶지만, 회복되지 않은 비루한 몸 상태로는 불가능했다. 그러니 페르디아 공작의 정보력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걸 물어볼 줄 몰랐다는 듯한 공작의 시선에 나는 적극적으로 필요성을 주장했다.
“갑자기 이상한 마수가 나타난 것도 그렇고, 1황자 전하와 카를로트가 공격당한 것도 그렇고,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잖아요. 혹시 배후가 있는 건지 궁금해서요.”
스윽. 다가온 커다란 손이 이불을 얼굴 반까지 가리며 도로 끌어 올렸다.
“황실에서 조사관이 파견되었다더군. 하지만 특이한 정황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들었다.”
“얀시 말로는 1황자가 공격당했으니 황비 세력이 관련되어 있을 수 있다던데.”
얀시가 웃으며 거들었다. 역시 두 사람은 게이브 제나이드의 개입을 예상도 못 하는 듯했다. 이런 상황에서 게이브가 수상하다고 말하는 건 도리어 내가 수상하게 보일 수 있었다.
이번 사건으로 게이브의 얼굴을 확인했으니 이후 어떻게 해야 할지 논의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서 또 은근슬쩍 불편한 이불을 내리는데, 이번에는 공작 부인이 내 이불을 도로 끌어 올리며 물었다.
“그런데 리리. 왜 그렇게 요란하게 권능이 있다는 걸 공표한 거니?”
더 이상 내 운명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기로 한 이상 예정되어 있던 일이었다. 이왕 밝힐 거 파격적으로 밝히는 게 좋겠지.
“이제 리리 너를 두고 권능이 없다며 헛소리할 치들은 없을 테니 그건 좋구나.”
그 말이 진심인지 공작 부인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런데 황실에서 권능 검증한다고 나오면 어떡하려고.”
얀시가 걱정스레 물었다. 내가 그걸 두려워했던 건 내가 사실 세베레스 공작의 친딸이라는 걸 페르디아 공작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 알고 있으니 황실의 권능 검증 따위야 두렵지 않았다.
이 권능이 세베레스의 권능이라는 걸 들키지 않으려면 페르디아 공작의 입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페르디아에 내가 남아 있길 바란다면 페르디아 공작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으니 이 정도는 일도 아닐 것이다. 승부욕이 생기기라도 했는지 페르디아 공작이 언뜻 카를로트와 닮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카를로트는 눈을 뜨자마자 내 침실에 쳐들어왔다. 쾅! 노크도 없이 세차게 문이 열렸다.
내 머리맡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자고 있던 탐욕이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기세 좋게 들어오는 카를로트를 보며 탐욕이 작은 목소리로 불만스레 한마디 했다.
아무리 독이 정화되었다고 해도 독성이 세서 이렇게 뛰어다닐 정도는 아닐 텐데. 어려서 그런지, 그것도 아니면 카를로트의 체력이 비정상적으로 좋아서 그런 건지, 어쨌든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척척 걸어와 침대 옆에 풀썩 앉은 카를로트가 침대에 고개를 기대며 두 눈을 반짝였다.
얘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일어나자마자 달려와서는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아직 아픈가 싶어 이마에 손을 갖다 댔지만, 열은 없었다. 혹시 카를로트가 말하는 ‘이겼다’는 게?
이 녀석, 뇌 속에 ‘파괴’만 가득 찬 걸까. 죽다 살아났건 말건 눈을 뜨자마자 승패만 생각하는 카를로트야말로 누구보다 페르디아의 속성과 어울리는 인간이 아닐까.
“토벌전은 중단됐으니까 아무도 안 이겼어, 바보야. 가서 쉬기나 해.”
훠이훠이. 손까지 내저으며 핀잔을 주었지만, 카를로트는 오히려 두 손을 모으고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쩌렁쩌렁 소리 지르는 카를로트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찰싹, 찰싹! 등짝을 때리자 카를로트가 헤실헤실 웃었다. 변태가 따로 없었다.
“하나도 안 아픈 거 알아? 누님 혹시 강아지풀이야?”
하다 하다 사람을 강아지풀 취급하다니. 사경을 헤매다 깨어난 주제에 카를로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미 한 번 살린 적 있는데, 두 번이라고 못 살릴 이유가 없었다. 카를로트가 두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서는 나를 부담스럽게 쳐다보며 물었다.
헤벌쭉 웃는 카를로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건 미처 생각 못 한 건지 카를로트가 헉, 하며 숨을 삼켰다.
멍청한 카를로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큰일이다. 아무래도 바보력이 전염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